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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 제 2영역시집 'SF-Consensus(SF-교감)' 출간한 박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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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스럽고 맛깔스러운 삶 표현, "시인은 속세와 한통속돼야"

[허진석의 책과 저자] 제 2영역시집 'SF-Consensus(SF-교감)' 출간한 박제천 서울 동숭동 문학아카데미에서 인터뷰하는 박제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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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서울 동숭동에 있는 예술가의 집에서 문학아카데미가 주최한 시의 축제가 열렸다. 한 해에 네 번, 계절 따라 시인들이 모여 자작시를 낭송하고 친교도 나누는 자리다. 축제의 주인은 박제천(72)이다. 하지만 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리고 행사장의 분위기는 마치 누군가를 애도하는 듯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박제천은 행사가 열리기 한 주일 전 서울대학병원으로 실려 갔다. 거기서 한동안 현실 밖의 세계를 주유했다. 축제에 참석한 시인들 사이에 "선생께서 위독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들은 박제천의 애연과 알코올 사랑이 그를 쓰러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알레르기 때문이었다. 과일주가 그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 누군가 바친 미주(美酒)를 받아 마셨다가 발작을 일으켰다.

 박제천은 며칠 뒤 깨어나 지인들에게 "와인이나 마시자"고 전화를 했다. 와인은 괜찮다. 나도 그가 퇴원한 이틀 뒤에 목소리를 들었다. 카카오톡이 먼저 왔다. 'HI'라고 외치는 이모티콘에 이어 "바쁘냐"는 문자가 떴다. 얼른 전화를 했다. 그는 한 잔 하자고 했다. 일주일 뒤 혜화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알콜도수 13.5%짜리 와인을 세 병 땄다. 거기서 노래하는 듯 아름다운 그의 시와 인생 강의를 들었다. 마지막 잔을 비우고 일어설 때 그는 책 한 권을 쥐어 주었다. 새 시집이었는데, 온통 영문자로 인쇄했다. 제목은 'SF-Consensus(SF-교감)'. 고창수 시인(83)이 번역한 박제천 제2 영역시집이다. SF-Consensus 등 80편을 수록했다. 나는 성균관대 입구, 중앙차로에 있는 버스정류장 철제의자에 앉아 시집을 펼쳤다. 표제작을 찾아 읽었다.



금강초롱 꽃잎 속 황금 꽃술로 발돋움하는 너를 본다
氣치료를 받고 와서, 태어나 처음으로 들여다보는 배꼽
금강초롱 꽃잎 속 배꼽에서 배꼽으로 퍼져나가는
우주의 파동을 느낀다
꽃잎 가득, 배꼽 가득,
눈부신 햇살도 눈 시린 눈발도 모두 받아들여
황금꽃술로 발돋움하는 너를 본다
단전에 가득 불을 피워 덥히는 내 삶도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해소기침도
예서 물려 받았단다
꽃잎 속에 손을 넣으면
문득 외계의 하늘이 서른 세 하늘로 층층이 쌓이고
그 어느 하늘에 금강초롱으로 피어나는
어머니의 배꼽 있으니
나 있는 여기서도 개벽의 꽃 속으로 들어가는 길 보이느니,
그곳에서 내 배꼽을 꼭꼭 누르는 손길을 느끼느니


[허진석의 책과 저자] 제 2영역시집 'SF-Consensus(SF-교감)' 출간한 박제천 SF-Consensus

 박제천의 시가 영어로 번역돼 해외에서 출간되기는 처음이 아니다. 지난 1997년에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시리즈 88호로 출간한 첫 영역시집 '별 하늘에 배를 띄우고(Sending the Ship Out to the Stars)'에 그의 초기작이 실렸다. 또한 그의 시는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베트남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되어 각국에 알려졌다. 대한민국의 시인이 노벨상을 받는다면 박제천이 가장 먼저는 아닐까. 시는 산문에 비해 번역하기 어렵다는 통념이 있다. 박제천은 다르게 생각한다. "번역을 해도 시에 담은 에센스는 훼손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라임(rhyme)을 말하지만 영미권에서도 자유시를 많이 쓰니까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 자체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 번역해야겠죠."


 나는 박제천의 친구인 미하엘 오거스틴(64)을 생각했다. 독일 시인 오거스틴은 지난 2015년 아시아경제와 인터뷰하면서 "(번역의 성패는) 두 문화를 고향으로 두어, 그 사이에서 틈새를 연결해 줄 뛰어난 번역자에게 달려 있다"고 했다. 박제천은 오거스틴과 1984년 미국 아이오와 국제창작프로그램(IWP)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IWP의 초청시인으로 메이플라워아파트 8층에서 석 달 동안 살았다. 오거스틴은 "박제천과 나는 침실과 부엌 그리고 아주 많은 맥주를 함께 했다"고 했다. 박제천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다음은 ‘어깨동무’라는 시다.



아이오와에서 녀석과 함께 들르는 술집은 두 군데
아일랜드 맥주만 파는 집과 18개국 55종의 맥주를 파는 집
아일랜드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아일랜드 시인들을 위해 건배했고
수많은 나라의 맥주를 음미하며 우리는 다른 세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건배했다
그런 밤마다 우리는 아이오와의 새벽거리를 걸어서 돌아왔다
낯선 거리와 거리, 불은 켜 있으나 두드릴 수 없는 집 사이로 어깨동무를 하며
어두운 밤바람 사이로 트림과 기침을 하며
그때마다 길바닥에 깔린 우리의 그림자는 고기 지느러미처럼 퍼덕거렸다
버릇처럼
다리를 지날 적엔 검은 개울물에 번쩍번쩍 빛나는 오줌을 싸 갈겼다
서른 살 무렵이 서러우냐고 내가 물었다
녀석은 제 고향 이름이 금박으로 찍힌 브레멘 라이터를 내밀었다.
담뱃불을 붙이며 장가는 안 드냐고 내가 물었다.
녀석은 토요일 밤이면 라디오 마이크와 씨름을 하노라 바쁘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말이 불통해 답답하냐고 녀석이 말했다
장발에 콧수염을 단 네녀석 모습이 해적 같다고 내가 말했다.
다음날 아침 녀석은 영한사전을 꺼내더니 한국어로 술고래라고 중얼거렸다
누가, 우리가…… 그러다 우리는 또 한 잔 하기로 하였다
녀석은 서른두 살짜리 서독의 시인, 그날 이후로
해적과 술고래는 더욱 진진하게 술을 마셔댔다.



[허진석의 책과 저자] 제 2영역시집 'SF-Consensus(SF-교감)' 출간한 박제천 박제천 시인과 미하엘 오거스틴(오른쪽부터)

 박제천은 이때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물리적으로 환기된 시기"라고 했다. 그는 "디테일에서 차이를 보았다. 우리는 자기소개서에 아무개, 시인, 몇 년도 어디어디 등단, 이런 식으로 쓴다. 거기 모인 예술가들은 그렇게 안 썼다. 저서만 적은 사람도 있고… 그냥 시인이 아니라 자기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시니까 시를 쓴다는 식이었다"라고 했다. 아이오와에서의 환기는 갑작스런 일이 아니다. 박제천이 청년 문사 시절 품었던 꿈의 씨앗이 발아한 것이다. 그는 영향을 받은 시인으로 토마스 엘리엇, 샤를 보들레르, 아르튀르 랭보를 꼽았다. 특히 엘리엇은 균형 잡힌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동양정신에 대한 깊은 이해를 작품에 관철한 인물이다. 박제천이 보기에 당시(唐詩)를 번역해 이미지를 추출해냄으로써 영미 현대시의 20세기를 점화한 에즈라 파운드도 엘리엇만큼 훌륭하지 않다.


 박제천은 매우 복잡한 시인이다. 첫 시집 '장자시'에서부터 동양정신과 우주를 아우르며 세계를 향해 열린 감성을 드러낸다. 그는 "나는 아무도 흉내 내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홀로 시업을 거듭해 한국어 시집만 열다섯 권을 냈다. 그의 동양정신과 우주는 지난 2005년 7월 아내와 사별한 뒤 자신만의 내세관으로 나아간다. 다음은 시 ‘전화놀이’.



한밤중 [할버지 전화받으세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문득 창에 뜬 이름을 보니 지옥이다
받지 않기로 한다 아마 가까이 와 있나보다
밤하늘 바라보니
온 하늘 가득 문자메시지들이 반짝인다
별들은 모두들 진동으로 돌려놓았나보다
풍뎅이들 날개치는 소리만 번쩍번쩍 날아다닌다
불침번 서는 자미성과 부처님만
가끔 오줌 지리듯 부르르 몸을 떤다
하지만 나처럼 창에 뜬 이름만 확인한 채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낮에는 제 잘난 맛에 잘 놀다가
한밤중 마음이 깜깜할 때나 전화를 하면
정말 밉상이겠다
먼 데 사는 여자에게 전화를 하려다,
문자메시지만 보낸다
이승 시간은 참, 길다오.



[허진석의 책과 저자] 제 2영역시집 'SF-Consensus(SF-교감)' 출간한 박제천 시집 '달마나무'

시인은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에 아내의 이름이 뜨자 받지 않고 “이승의 시간은 참 길다오”라며 문자메시지를 보내는데, 그곳은 우주의 저편이리라. 병원에서 깊이 잠들었을 때, 그곳에 다녀왔을 것이다. 이 시가 실린 박제천의 제12시집 달마나무(2010)는 아내에 대한 사랑과 추모로 가득 찬 시집이다. 일렁이는 그의 정서는 14시집 ‘마틸다’로 이어진다. 마틸다는 흔히 보기 어려운 연가곡집인데, 시집의 제목은 천주교에 귀의한 아내의 세례명이다.


나는 지난 25일 서울 대학로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 가서 시인과 한 시간 남짓 대화했다. 스마트폰을 사용해 녹음을 하고 메모도 했으나 둘 다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박제천은 보길도 바닷가의 조약돌이 은근한 파도에 서로 몸을 기댔다 떼었다 하는 듯 매끄럽고도 리드미컬한 목소리로 시와 인생에 대하여 설명했다. 문인화에 낙관을 찍는 듯한 그의 언어는 나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굳이 메모를 보거나 녹음을 풀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시업 52년. 시인은 어디로 가려 하는가. 그는 눈을 달마처럼 부릅뜨면서 말했다. "풍류정신." 사람과 세계와 삶이 유별하지 않은 세계, 우리네 멋스럽고 맛깔스러운 삶의 더 깊은 지경까지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결국 시인이란 자신이 사는 세계의 바닥을 들여다봐야 해요. 그러려면 한통속이 되는 수밖에요. 그것은 이 땅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숨결, 정신일 테니까요." 기자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알콜 도수 14%짜리 와인을 한 병 탁자에 내려놓았다. 박제천은 우리 시의 큰스승이니 그 앞에 조아린 자의 속수(束脩)일레라.


[허진석의 책과 저자] 제 2영역시집 'SF-Consensus(SF-교감)' 출간한 박제천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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