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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34] 영화관을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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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34] 영화관을 나서며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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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그 사람 생각이 났습니다. 남해에서 나고 자란 어른께 들은 이야기 속 인물입니다. 한 시절, 부산이나 통영 가는 밤배를 타면 꼭 그가 있었다지요. 두루마기 갖춰 입고 갓을 쓴 노인 하나가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 배에 올랐다지요. 말하자면 영화 '서편제' 주인공을 닮은 사람.


배가 움직이면 어김없이 소리판이 펼쳐지고, 손님들은 숨을 죽이며 그를 바라보았답니다. 덕분에 항구를 떠난 연락선은 금세 바다 위의 극장이 되곤 했답니다. 소리꾼 하나가 선장 대신 배를 몰고 가는 형국이어서, 승객들은 그의 인질이나 포로가 된 것 같았다지요.

주로 심청가나 춘향가를 불렀는데, 절로 입이 벌어지고 침을 흘리며 듣게 되더랍니다. "아이고 우리 춘향이 불쌍해서 어쩌노." "심청이 아베는 우짤끼고." 할매들은 연신 눈물 콧물을 훔쳤다지요. 울고 웃다보면 배는 목적지에 와 있더랍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극장인지요. 노인은 얼마나 위대한 배우인지요.


좋은 소리꾼은 천의 얼굴을 가진 사람. 춘향이가 이도령이 됩니다. 월매인가 하면 변사또입니다. 순식간에 마스크를 썼다 벗었다 합니다. 타고난 재주만은 아닙니다. 혼자서 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의 몸 안에는 그렇게 많은 배우들이 들어있습니다. 부채 한번 접었다 펼 때마다 그들이 나왔다 들어갔다 합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34] 영화관을 나서며


그는 배우인 동시에, 감독입니다. 제작자입니다. 모든 권한을 다 가졌으니, 캐스팅도 마음대로 합니다. 춘향도 심청도 최고를 불러옵니다. 공력(功力)을 총동원하여 최적의 외모와 성격을 그려냅니다. 가장 놀부다운 놀부와 뺑덕어미를 빼닮은 뺑덕어미를 눈앞으로 데려옵니다.


영화라면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모두가 공감할 춘향의 선발이 쉽지 않고 누구나 혀를 찰만한 놀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영화는 출발부터 절망적입니다. "에이 무슨 춘향이가 저렇게 생겼어." "놀부가 놀부로 보이지 않는구만." 그래서 '라디오 춘향이'가 'TV춘향이'보다 훨씬 예쁩니다.


놀부는 놀부로 태어났다 싶은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놀부가 살지 못하면 흥부도 죽습니다. 흥부를 흥부로 만드는 사람은 놀부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배우는 그 배역으로 타고난 사람이거나, 출중하게 준비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배우는 사라지고 극중 인물만 남아야 합니다.


언뜻 '메릴 스트립'이 떠오릅니다. 좋은 배우의 전형이지요. 영화 속에서 그녀는 완전히 실종됩니다. '철의 여인' 속에 그녀는 없습니다. '마가렛 대처'가 있을 뿐입니다. 스크린 속에서 배우는 사라져야 합니다. 이순신을 맡은 배우가 죽어야 이순신이 살아서 우리 앞으로 옵니다.


극장을 나서다가, 방금 본 영화(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주인공이 올해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케이시 애플렉'. 그는 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를 울리거나 아프게 하더군요. 그는 우리의 상처와 부끄러움 중에는 굳이 숨기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 더 많음을 심상히 일러줍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동작들이 인생에는 연습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관객 대신 참고 견디고 버텨줌으로써 영화 밖의 신산한 삶이 지속되어야 할 이유를 일러줍니다. '문 라이트'의 조연 '마하샬라 알리나'도 스크린 안에선 보이지 않습니다. 이웃집 아저씨가 보일뿐입니다. 그가 '흙수저'의 아이들을 위로합니다.


최근에 제가 본 영화들 중에는 유난히 사회성 짙은 영화(socio drama)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제 취향이 그래서겠지요. 하지만 그런 영화들이 그만큼 많이 만들어졌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입니다. 당연히 제 머리 속에는 영화배우들보다는 그들이 연기한 얼굴들이 더 많이 남아있습니다.


몇 사람은 뉴스 속 인물처럼 아주 또렷한 얼굴입니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다니엘 블레이크'씨. 우리 사회 안전망과 코리언 드림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여자 '한매'씨. 수천 킬로 바깥에 홀로 떨어진 공포를 온몸으로 보여준 다섯 살 꼬마 '사루'.


공통점은, 배우들 모두 제 기억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배우 '데이브 존스'(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없습니다. '공효진'(미씽)도 없습니다. '써니 파와르'(라이언)도 없습니다. 빙의(憑依) 수준의 연기를 경험하게 해준 배우들. 말할 것도 없이 성공적인 캐스팅입니다.


광화문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어집니다. 한번 모이면 수십만 명, 연인원 천만 명을 훌쩍 넘은 사상최대의 블록버스터. '세상은 하나의 무대, 모든 인간이 배우'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게 만드는 영화. 우리 스스로 배우이면서 관객이며 제작자인 영화. 결말은 아무도 모르는 영화.


뉴 페이스든 베테랑이든, 어디선가 위대한 배우 한 사람이 나타나야 완성될 영화. 오래된 배역이지만 전혀 새로운 차원의 연기를 보여줄 사람, 이 작품에 목숨을 걸 준비가 된 사람이 꼭 필요한 영화.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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