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만에 영화 '다방의 푸른 꿈'으로 만나는 '김시스터즈'
사촌지간 김민자·숙자·故김애자 1950년대부터 미군부대서 활동
불꽃인기로 라스베이거스 진출…엘비스 프레슬리 등 당대 최고 스타들과 한무대
'14년간의 활동' 다큐영화로 부활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9월의 그 무렵을 상기해 보세요. 인생의 걸음이 느리고 또 원만했던 무렵을(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When life was slow and oh, so mellow)." '트라이 투 리멤버(Try To Remember)'는 김민자(76) 씨에게 특별한 노래다. 요즘도 무심결에 자주 흥얼거린다. 감미로운 가사를 음미하다 보면 눈가에 뱅그르르 눈물이 맺힌다. "이 곡만 부르면 눈물이 나요. 지나간 시간이 떠오르거든요. 가슴이 벅차오르다가 가라앉죠. 아주 행복한 일이에요."
그녀는 CBS TV '에드 설리번 쇼'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 씨(1916~1965)와 작곡가 김해송 씨(1911~?) 부부의 두 딸인 김숙자(78) 씨, 고 김애자(1940~1987) 씨와 함께였다. 김민자 씨는 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1914~1987) 씨의 딸이다. 6ㆍ25 전쟁이 끝나갈 무렵부터 사촌들과 노래를 연습했다. 사람들은 '김시스터즈'라고 불렀다. "포탄이 날아드는 전쟁통에 내려간 부산에서 고모가 영어 음반을 틀어주며 외우라고 했어요. '캔디와 케이크(Candy And Cake)'와 '올드 버터밀크 스카이(Old buttermilk sky)'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열심히 불렀어요. 당시 귀했던 바나나를 노래를 다 부르는 사람에게만 나눠줬거든요."
미 8군에서의 무대는 뜨거웠다. 많은 군인들이 "베이비"를 연호하며 앙코르를 요청했다. 관람료는 위스키와 초콜릿. 그걸 팔아 쌀과 소금을 샀다. "그땐 수줍음이 참 많았어요. 무대에 오르다 발이 걸려 스탠드를 넘어뜨리기도 했죠. 긴장해서 한 곳만 뚫어지게 봤더니 사람들이 눈이 모여서 사팔뜨기 같다며 놀렸어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김시스터즈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주한미군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소문을 들은 미국의 쇼 기획자 톰 볼은 이들의 가능성을 눈으로 확인하고 이난영과 계약했다. 1959년 1월 김시스터즈를 데리고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지난달 26일 개봉한 김대현 감독(52)의 '다방의 푸른 꿈'은 그녀들이 미국에서 명성을 떨친 과정을 당시 화면을 편집해 보여준다. 김민자 씨의 인터뷰와 각종 사진을 토대로 다양한 뒷이야기도 전한다. 김시스터즈는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매일 자정부터 오전 7시까지 공연해 유명해졌다.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 롤링스톤즈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이 출연한 에드 설리번 쇼에 스물두 번이나 얼굴을 내밀었다. "프랭크 시나트라(1915~1998), 바브라 스트라이샌드(75), 롤링스톤즈의 믹 재거(74) 등과 대기실을 함께 썼어요. 내 영어가 서투른데도 항상 웃으면서 말을 건넸죠. 특히 프레슬리는 숙자 언니를 많이 좋아했어요. 몇 차례 데이트를 신청했는데, 언니가 시간을 낼 수 없었어요. 1년에 쉬는 날이 보름도 채 되지 않았거든요. 나중에 얘기를 전해들은 가족들이 '그때 잡았어야지'라면서 아쉬워하더라고요(웃음)."
김시스터즈는 당초 3개월 계약을 했지만 1973년까지 14년간 활동했다. 기타, 베이스, 드럼, 색소폰, 가야금, 아이리시백파이프 등 스무 개 이상의 악기를 능수능란하게 연주하며 현지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덕이었다. 잡지와 방송의 평론가들은 호평했고, '라이프'지는 1960년 2월호에 특집 화보로 소개했다. 1960년 출시한 첫 음반의 타이틀곡 '찰리 브라운'은 1962년 빌보드 싱글차트에 올랐다. "실력도 괜찮았지만 당시 동양인 그룹이 우리뿐이었어요. 미국인들이 많이 신기해했죠. 언니들과 한복을 입고 다니면 모두가 쳐다봤어요. 태연한 척 걸었지만 선진 문물에 대한 놀라움까진 숨길 수가 없었어요. 밤길을 환하게 비추는 가로등이 너무 신기했거든요. 찻길을 건널 때 초록불이 켜진 곳을 찾느라 애를 먹기도 했어요."
김시스터즈는 미국 밖으로도 진출했다. 1966년 유명 사회자 밥 호프(1903~2003)와 함께 베트남에서 참전 미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했고, 그해 이탈리아ㆍ영국ㆍ프랑스ㆍ스페인ㆍ독일 등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지금도 김민자 씨의 기억에 생생한 것은 시카고 공연이다. "6ㆍ25 전쟁으로 미군이 많이 죽었잖아요. 그때 다리를 잃은 퇴역 군인이 찾아와서 '너희들이 벌인 전쟁 때문에 내 몸이 망가졌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요. 경호원의 제지로 퇴장했지만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죠. 관객들의 응원 덕에 겨우 공연을 이어갈 수 있었어요."
승승장구했지만 타지에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베이컨 등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마다 김치와 깍두기가 떠올랐다. 김시스터즈의 히트곡 '김치깍두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아버지가 직접 곡을 쓰셨어요. 만날 김치랑 깍두기가 먹고 싶다고 편지에 썼더니 노래를 써주시겠다고 하더라고요. 직접 배추와 고춧가루를 사서 김장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방송 스태프들이 코를 킁킁거리면서 '너희 중에 마늘 먹은 사람 있냐'고 묻더라고요. 너무 창피해서 김치를 멀리하기 시작했죠."
김민자 씨는 김시스터즈에서 물러나 헝가리 유명 재즈 뮤지션인 토미 빅(79)과 결혼했다. 로스앤젤레스와 부다페스트에서 살면서도 고국을 잊은 적은 없다. 1966년 일본 도쿄 공연에서의 아픈 기억 때문이다. "공연을 마치고 화장실에 갔는데 갑자기 여자 분들이 들어와서 손을 잡으며 부둥켜안지 뭐예요. 영문을 몰라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저희 한국 사람이에요"라면서 울더라고요. 한국 사람인 게 드러나면 큰일 난다고 하더라고요. 울컥한 마음에 함께 주저앉아 엉엉 울었어요."
그녀는 고국에서 김시스터즈가 다시 조명되는 데 대해 "영광스럽다"고 했다. 어린 시절 뛰놀던 서울시 중구 필동 2가에 있는 집이 폭격을 맞아 사라졌지만 자주 한국을 찾겠다고 했다. "김대현 감독이 우리를 한류의 개척자로 소개해줘서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요. 이런 그룹이 있었다는 걸 젊은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이번 영화를 계기로 어렴풋이 기억해줬으면 해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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