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하기에 좋은 표정이 있다
꽃집마다 찻집마다 물구나무선 채
벌 받는 자세의 드라이플라워가 있다
꽃잎 사이로 마른버짐 같은 기침이 와락 쏟아지는데
스타치스, 시네신스 같은 꽃들은
멀리 꽃밭을 떠나올 때보다 낯빛이 더 짙어져
생화인지 조화인지 모를 병을 앓고 있다
전시하기에 좋은 죽음이 있다
대영박물관 이집트관에는 눕지도 서지도 못 하는
수천 년 전의 미이라가 있다
자세가 너무 반듯해서 볼 때마다 서늘해지곤 한다
카이로에서 런던까지 운하로 약탈되고도
그들은
죽어서도 살아서 관람이라는 형벌을 견디고 있다
각설하고,
죽음에게서 나를 덜어내 먼지로도 떠돌지 말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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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자신의 사후가, 아니 냉정하게 말하자면 시체가 전시되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산 자들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곁에 두고 죽음을 헤아리고 그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즉 역설적이게도 죽음에 대해 말하는 자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자인 것이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내가 생각하는 바는 이렇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물은 태어날 때부터 실은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죽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자에게 깃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말하자면 이미 죽은 사람은 오히려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자다. 그러니 "드라이플라워"나 "미이라"는 죽음의 증표가 아니라 차라리 죽음마저 소멸한 가늠할 길 없는 '무(無)'를 가까스로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산 자들은 어쩌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 속에 서려 있는 죽음까지도 사라진 저 물자체가 말이다. 그래서 자꾸 거기에다 죽음을 덧바르고 저것이 바로 죽음이라고 우기는 게 아닐까.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산 자들이 흔히 죽음이라고 부르는 저 죽음 이후에 대해 결연하고 숭고하기까지 하다. "각설하고,//죽음에게서 나를 덜어내 먼지로도 떠돌지 말 것"!
채상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