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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성해

시계아이콘읽는 시간49초

서너 달이나 되어 전화한 내게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고 할 때
 나는 밥보다 못한 인간이 된다
 밥 앞에서 보란듯 밥에게 밀린 인간이 된다
 그래서 정말 밥이나 한번 먹자고 만났을 때
 우리는 난생처음 밖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처럼
 무얼 먹을 것인가 숭고하고 진지하게 고민한다
 결국에는 보리밥 같은 것이나 앞에 두고
 정말 밥 먹으러 나온 사람들처럼
 묵묵히 입속으로 밥을 밀어 넣을 때
 나는 자꾸 밥이 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밥을 혀 속에 숨기고 웃어 보이는 것인데
 그건 죽어도 밥에게 밀리기 싫어서기 때문
 우리 앞에 휴전선처럼 놓인 밥상을 치우면 어떨까
 우연히 밥을 먹고 만난 우리는
 먼산바라기로 자꾸만 헛기침하고
 왜 우리는 밥상이 가로놓여야 비로소 편안해지는가
 너와 나 사이 더운 밥 냄새가 후광처럼 드리워져야
 왜 비로소 입술이 열리는가
 으깨지고 바숴진 음식 냄새가 공중에서 섞여야
 그제야 후끈 달아오르는가
 왜 단도직입이 없고 워밍업이 필요한가
 오늘은 내가 밥공기를 박박 긁으며
 네게 말한다
 언제 한번 또 밥이나 먹자고


[오후 한詩]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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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한 끼 나누어 먹는 일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싶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당장 먹고사는 일과 관련이 없거나 특별히 여럿이서 모이는 경우가 아니라면 "밥이나 한번 먹자"는 말은 빈말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럴 때가 있다. 누군가를 만나 "밥이나 한번 먹"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말이다. 어쩌다 다행히 그 말이 정말이 되어 홀연히 단 둘이 앉게 되면 그런데 이상하게도 살짝 서먹하고 왠지 불편하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의 말 그대로 "정말 밥 먹으러 나온 사람들처럼" 주문을 하고 밥을 먹고 날씨 얘기나 하고 그런다. 왜 그럴까? 사람들마다 그 이유야 다르겠지만 아마도 좀 서운해서이지 않을까, 서운하기도 하고 또 그런 만큼 미안하기도 해서. '그래, 지난 서너 달 동안 나 참 쓸쓸했는데, 너도 그랬구나', 이 한마디 건네고 싶었는데 내내 밥공기나 "박박 긁으며" 차마 그러지는 못 하고 눈치나 보고 말이다. "밥이나 한번 먹자"라는 말, 그러니까 그 말은 단지 쓸쓸함을 넘어 간절하게 사람이 그리웠고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뜻인 셈이다. 친구야, 전화해라. 밥이나 한번 먹자. 그보다 만나면 일단 먼저 꼭 끌어안기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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