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을 훌쩍 뛰어넘어, 대중가요로 등장한 '소세양 연가'…그 불멸의 여인에 대한 오마주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혹시 이런 시를 들어보았는가? 황진이가 쓴 것으로 알려진 한시다. 한때 인터넷에선 이 시가 화제에 오르내렸다.
소슬한 달밤 무슨 일을 생각하나요
침실의 밤 뒤척뒤척 꾸는 꿈은 어떤가요
때로는 잊은 말도 기록하는지
이 세상의 연분 믿어도 좋을지요
멀리 계신 님 생각, 끝이 없네요
하루 하루 내 생각 얼마나 하시는지
바쁠 때에 나를 생각하면 귀찮나요 반갑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좋은가요
蕭寥月夜思何事 寢宵轉輾夢似樣
소요월야사하사 침소전전몽사양
問君有時錄忘言 此世緣分果信良
문군유시녹망언 차세연분과신량
悠悠憶君疑未盡 日日念我幾許量
유유억군의미진 일일염아기허량
忙中要顧煩或喜 喧喧如雀情如常
망중요고번혹희 훤훤여작정여상
이 시, 왠지 익숙하지 않은가? 가수 이선희가 노래한 '알고 싶어요'와 내용이 흡사하다. 어찌된 일일까. '알고싶어요'는 작사가 양인자가 지었다. 양씨는 황진이의 시를 아름답게 풀어낸 것일까. '알고싶어요'의 가사를 다시 한번 들여다 보자.
달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마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알고 싶어요’ / 이선희
과연 한시와 노래 가사가 매우 닮아있다. 그러나 이 한시는 황진이의 작품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작사가 양인자와 작가 이재운이 인터넷에 설명하는 글을 올렸다.
이재운은 주간조선에 ‘청사홍사’라는 연재글을 쓰고 있었는데, 거기에 황진이에 관한 사랑의 에피소드들을 엮었다. 작가는 황진이가 소세양을 유혹하는 대목에 쓸 만한, 그녀의 한시가 없나 하고 찾다가 적당한 것이 보이지 않자 차라리 요즘의 대중가요 중에서 그럴 듯한 것을 찾아 한시로 번역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알고 싶어요‘가 이재운의 눈에 띄었고, 그 노래가 황진이의 ’귀여운 유혹‘을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작가는, 노래의 작사가인 양인자에게 허락을 받고 한학에 밝은 김승종 시인과 함께 한시로 ’번역‘을 했다. 그랬던 것이 황진이의 진짜 시로 알려져 오해를 불렀다.
그러니까 저 한시는 양인자의 가사를 김승종이 한역한 것일 뿐, 황진이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황진이의 감성을 현대적으로 살려내려는 이재운의 노력 덕분에, 이 아름다운 기생은 500년을 훌쩍 뛰어넘은 다른 시간 속에서 연시를 지어 인터넷에 퍼뜨리는 위력을 발휘한 셈이다.
황진이는 우리 역사 속을 걸어간 영원한 아이돌이며, 세상과 남자를 경멸하면서 꿋꿋이 조선여자의 길을 걸어간 자유인이다. 그보다도 더 나를 흔드는 것은, 그녀의 내면에 깃든 허허로우면서도 대담하고 대담하면서도 세심하고 세심하면서도 절절한 시적 감수성이다. 그녀의 언어는 아주 조금 밖에 남지 않았으니 한 시대를 비췄을 시적 정채(精彩)를 채 다 구경하진 못하는 게 한일 뿐이다.
이야기의 처음에 시작한 말을 돌이켜 보자. '황진이를 모르는 사람도 없고, 황진이를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 그녀의 삶은 아프게 뒤채이며 한 시대의 질곡을 살아낸 한편의 시가 아닐까.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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