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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 창비시선 400 기념시선집,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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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 창비시선 400 기념시선집,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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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1984년이다. 동네 서점에서 ‘마침내 시인이여’라는 새 시집을 뽑아들었다. 나는 대학생이었다. 시를 공부하면서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에서 나온 시집을 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마침내 시인이여’도 ‘창작과비평’에서 나왔다. 그 무렵 나는 ‘창비’에서 나온 시집들에 슬슬 물려가고 있었다. 그래도 ‘마침내 시인이여’를 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여기 실린 시인들의 면면은 그 시대를 수놓은 시인들 가운데서도 올스타라고 할만 했다. 고은, 조태일, 김지하, 양성우, 정희성, 이동순, 허형만, 김영석, 송기원, 하종오, 이영진, 김정환, 나해철, 김용택, 김용락, 김희수, 이은봉. 책이 나온 내력은 다음과 같다.


1980년 계간 ‘창작과비평’ 봄호가 서남동, 송건호, 강만길, 백낙청의 좌담을 마련했다가 계엄사 검열단에 의해 전문 삭제되어 발행된다. 그해 4월 양성우 시집 ‘북치는 앉은뱅이’가 판금된 데 이어 7월말 ‘창작과비평’이 신군부에 의해 폐간되었다. 시인들의 발표 지면이 갑자기 줄었고, 창작과비평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작 시집을 기획했다. 1981년 13인 신작 시집 ‘우리들의 그리움은’이, 이듬해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가 나왔다. 세 번째로 나온 책이 ‘마침내 시인이여’다. ‘책머리에’는 이런 토로를 담았다.

“새로운 연대에 접어든 지 벌써 다섯 해째를 맞는다. 계간 ‘창작과 비평’이 폐간되면서 발표지면이 갑자기 줄어들게 된 상황에서 기획된 이 신작시집의 첫 권을 내면서 우리는 이러한 선집이 우리 시대의 삶에 대한 하나의 증언이 되기를 기대 하면서 새 연대를 맞아 의욕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한국시의 새로운 흐름을 그때그때 적절히 수용해 보고자 다짐했었다. 우리의 이러한 다짐이 얼마만큼 실현되었는지는 독자 여러분들께서 냉철히 평가해 주시리라 믿지만, 변명부터 앞세우자면 잡지도 아닌 하나의 작은 선집이 한시대의 시적 흐름을 주체적으로 주도해 나간다는 것이 상당히 벅찬 과업이었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시인이여’를 읽고 크게 감동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이 당시 ‘창비’가 내는 시집에 실리는 작품들과 별 차이 없다고 생각했다. 초기에 나온 신경림이나 조태일 같은 시인의 시집을 빼면 읽을 만한 시가 드물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시영, 정희성의 시에 마음을 빼앗기고 곽재구의 ‘사평역’을 그리워했지만.) 젊은이가 뭘 조금 배우게 되면 무서운 게 없어지는 법이다. 어설프게 시 쓰기를 배워두고 내심 ‘등단’을 넘볼 무렵, 나는 태권도를 배워 이제 막 초록띠나 청띠를 두른 소년처럼 호전적이고 논쟁적이었으며 무모했다. 아마 그래서 이 시집에 실린 작품을 읽고 감동도 배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에 사들인 시집을 요즘도 다시 꺼내 읽는다. 가끔은 당시에 굵은 손가락 마디로 빠져나가버린 감동을 다시 누린다.

‘나는 책머리에’처럼 뭔가 꾹꾹 눌러 말하는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허풍, 거창하게 떠들어댄다는 생각을 한다. ‘창비’에서 내는 시집들은 저마다 제 힘으로 독자를 만나 호소하거나 속삭인다. 그러니 뭉뚱그려 말하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신경림이 ‘갈대’에서 노래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뭐라는 건가. 감동. 감동뿐이다. 성찰과 자각이 화학반응처럼 내면에 포말을 일으킨다. 그럼 닥치고 감동하면 된다. 조용히 속으로.


해설이나 서평, 작품평, 머리말, 편집후기 같은 글을 잘못 읽으면 ? 좀 고약하게 말하자면 - 삐끼나 포주, 앵벌이 두목의 목소리를 듣고 만다.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시인과 소설가와 지식인 등이 출판사와 소위 문화 권력의 소속 연예인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서커스단의 광대처럼, 송곳니를 뽑힌 수사자처럼. 무대는 신작발표회, 출판기념회, 독자사인회, 시상식 등이고. 또한 시인과 소설가와 지식인 등은 이 무대에 서기를 얼마나 갈망하는가? 장래희망이 ‘연예인’ 또는 ‘아이돌’인 어린이처럼 말이다. ‘배우가 되겠다’든가, ‘가수가 되겠다’든가 하는 말은 듣기 어렵다. 배우가 되겠다는 말은 연기를 하겠다는 뜻이다. 가수가 되겠다는 말은 노래를 부르겠다는 말이다. 스마트폰 가게 앞에서 나에게 손가락질하는 저 아가씨는 배우인가 가수인가?


(노래를 못해도 가수를 할 수 있고, 시가 뭔지 몰라도 시인이 될 수 있는 시대, 혀가 짧아도 연기를 하고 우리말을 몰라도 배우가 되는 시대에 나라는 인간은 이 무슨 덜떨어진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가!)


이러한 사정 때문에, 나는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라는 책을 받아들고 몹시 긴장했다. 좁은 골목에서 단둘이는 만나고 싶지 않은 친구를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띠지에 이렇게 쓰였다. ‘창비시선이 개척한 눈부신 시의 영토 40년, 400권.’ 아… 어떻게 이렇게 쓸 수가 있지? 습관이 된 불평을 하면서 책을 뒤적였다. 좋아하는 시인의 작품이 여럿 실렸다. 그 중의 하나. “좌판의 생선 대가리는 모두 주인을 향하고 있다. 꽁지를 천천히 들어봐. 꿈의 칠할이 직장 꿈이라는 쌜러리맨들의 넥타이가 참 무겁지.”(함민복) 튼튼한 기본기를 가지고 잘 쓴 시, 단단한 시다. 이 아이디어는 “양쪽 모서리를 함께 눌러 주세요. 나는 극좌와 극우의 양쪽 모서리를 함께 꾸욱 누른다. 극좌와 극우의 흰 고름이 쭈르르 쏟아진다. ­나는 지금 빙그레 우유 200㎖ 패키지를 들고 있다”(오규원)처럼 오래됐지만 안전한 기술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이 시를 잘못 읽었다. ‘좌판’을 ‘좌파’로, ‘꽁지’를 ‘꽁치’로. 그렇게 읽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저렴하고 불량스런 감수성! 영원히 좋은 시의 영역 안에서 살기는 태생부터 글러먹은 것이다. 시나 문학, 예술 따위는 어깨너머로라도 배우지 말았어야 할 비루한 인간의 말로를 밝힌다.


40년, 400권은 역사다. 그 앞에 머리 조아린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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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시인 : 나희덕·문동만·강성은·이선영·박후기·안현미·최두석·남진우·이문숙·송경동·이대흠·조연호·이정록·정철훈·이기인·장석남·이영광·정복여·이세기·이제니·정호승·김혜수·김명철·권지숙·천양희·김태형·김윤이·조정인·유홍준·송진권·고은·도종환·이장욱·이혜미·최금진·최정진·박성우·고광헌·문인수·이시영·이상국·문태준·김선우·백무산·곽재구·김중일·김윤배·진은영·이병일·문성해·백상웅·김주대·고영민·김수복·김성대·함민복·주하림·김성규·김용택·김정환·엄원태·박형권·공광규·민영·정희성·권혁웅·신경림·유병록·황학주·전동균·정재학·신미나·손택수·이창기·김희업·김사인·최정례·김재근·박소란·고형렬·안주철·이현승·안희연·박희수·김언희·이병초 <박성우·신용목 엮음/창비/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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