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착 동행취재 ‘노인택배원’-종이가방 10개 메고 하루14km·2만보 걸어도 거뜬한 그들
[아시아경제 권성회 기자, 금보령 기자, 정동훈 기자]지하철 개찰구에 요금 '0원'이 찍힌다. 강남역에서 만난 지하철 택배원 하영일(69)씨는 "내가 아직 서비스할 수 있는 게 이거네요. 두 다리랑"이라고 했다.
지하철 요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65세 이상 노인들이 서류ㆍ화분 등 각종 물품을 배송하는 지하철 택배. 일하려는 노인들은 많지만 일터는 적은 상황에서 지하철 택배는 노인 일자리 대안 중 하나다. 지하철 택배원들은 다시 일할 수 있음에 즐거움을 느끼고 손자 용돈 벌이에 웃음 짓는다. 스스로 연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하철 택배원의 하루는 고단하다. 걷는 게 일이고 나르는 게 돈이 된다. 서울 곳곳을 누비며 걷는 거리가 하루 10㎞가 넘지만 지하철역 안에는 기대어 쉴 곳은 마땅히 없다. 산업화시기 30~40대를 보낸 한국의 노년층은 쉬지 못한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떠도는 지하철 택배원의, 노년의 삶을 들여다봤다.
◆8시간 이상 업무에 받는 돈은 2만원 = 지하철 택배 종사자들은 하루 4~5건 정도 배송을 담당한다. 기본 운임은 6000~7000원, 시외 배송은 1만원 이상이다. 대개 하루 3만원 정도의 수익을 얻는데, 이 중 30%의 수수료를 택배업체에 납부한다. 약 2만원의 일당을 받는 셈이다. 지하철 택배원들은 주로 '운동 겸 용돈벌이'로 이 일을 시작하지만 낮은 수입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매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한다는 지하철 택배원 김성식(70)씨는 "(이 일이)적게 벌고 돈 많이 쓰는 일이다"며 "편의점 들어가면 돈이다"고 말했다.
대다수 택배원들이 일용직 개념으로 일하기 때문에 업계 종사자 수를 정확히 알 순 없다. 서울시 인생이모작지원과에 따르면 지하철 택배에 종사하는 인구뿐 아니라 이를 운영하는 민간업체 수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을지로에서 지하철 택배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A씨는 "서울시 내에 지하철 택배 업체가 100곳이 넘는다. 택배원들은 업체당 10명에서 많게는 30명까지도 있지만 일을 금방 관두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서울시 내 지하철 택배원은 2000명 가량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휴식 공간 부족이 가장 큰 문제 = 지하철 택배원들은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을 큰 문제로 꼽는다. 하루 3~4건의 주문을 처리하면 2만 걸음(약 14km)을 걷게 되지만 대기 시간에 앉아 쉴 수 있는 곳은 마땅치 않다. 주로 유동인구가 많은 전철역 승강장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낸다. 서울시설공단이 운영하는 강남역 '허브플라자'같은 장소가 자연스레 이들의 쉼터가 된다. 이곳서 만난 하영일씨는 "강남역 오면 여기서 쉬지만 점심 지나면 학생들이 많이 와서 피한다"고 했다. 업체들도 이 사정을 잘 알고 있다. A 대표 역시 "택배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휴식 공간이 제대로 갖춰진 사무실이나 지하철 역 인근 쉼터가 확보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취재진이 찾은 업체들 중엔 TV나 바둑판 등이 구비돼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발로 버는 정직ㆍ떳떳한 일 = 서울시 안에만 2000명으로 추산되는 지하철 택배원. 이들이 택배원을 시작한 이유는 삶의 발자취처럼 다양하다. 교대역에서 만난 신모(73) 씨는 지하철 택배 일에 자부심을 드러냈다. 신씨는 "이것만큼 정직한 일도 없다. 받는 사람, 주는 사람이 있고 약속시간도 있다. 발로 뛰어서 버는 돈이다. 떳떳하고 당당한 일"이라고 했다. 노동 자체로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이들도 있다. 모 백화점에서 만난 황모(77)씨는 어깨에 배달할 종이가방 10개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는 "매일 유치원 가는 기분으로 출근한다"며 일에 대한 즐거움을 표했다.
하지만 노인 택배원들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시선도 있다. 한 백화점 매장의 점원 이모(28)씨는 "어르신들이 비 오는 날 고생하시는 모습이 가슴 아프다"라고 했다.
◆노인 일자리 늘리고 건강유지에도 도움 = A대표는 '노인 일자리' 창출이 지하철 택배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연금 수령액이 없거나 적은 '연금 사각지대'에 있는 노인들 입장에서는 이런 일자리가 많아지는 게 좋다"며 "집에서만 있기 싫은 분들이 운동도 하고 돈도 벌 겸해서 나온다"고 밝혔다. 이 업체 간판에는 '실버들의 일자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신촌의 또 다른 지하철 택배업체 대표 B씨는 지하철 택배가 건강 유지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택배원들이 일을 하면서 성인병 예방, 다이어트 등 건강관리를 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고 했다.
이용객들은 지하철 택배의 비교적 정확한 배송시간에 만족한다. 오토바이 퀵서비스나 화물차 택배는 도로 교통상황에 따라 배송 시간이 바뀌기 쉬운 반면 지하철 택배는 교통상황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요금은 퀵 서비스에 비해 1~2000원 정도 저렴하다.
권성회 기자 street@asiae.co.kr
금보령 기자 gold@asiae.co.kr
정동훈 기자 hoon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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