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현진 기자] 정부가 기업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면서 정부와 한국은행 등 국내 경제 수장들의 발언에 관심이 쏠렸다. 이들의 말 한마디에 따라 정책 방향이 결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부 경제수장인 기획재정부, 구조조정 주무부처인 금융위원회, '한국판 양적완화' 논쟁의 핵심이면서 통화정책 담당기관인 한국은행이 주 대상이다.
지난 3월 29일 총선 공약으로 처음 제기된 '한국판 양적완화' 논란부터 최근 국책은행 자본확충 협의체(TF) 첫 회의가 있기까지 각 경제 수장들의 발언을 살펴본다.
◆'속도전' 필요한 구조조정…마음 급한 유일호 부총리=우리나라 정부 경제 수장인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한 첫 반응은 "강봉균 위원장의 개인소신으로 당의 선거공약은 아닐 것으로 본다"였다. 유 부총리가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은 것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깨고 통화정책에 적극 개입하려한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한국판 양적완화가 대중의 관심을 받자 총선 직전 "일리가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유 부총리가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한은이 해야할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일은 없었다.
4·13 총선 직후 유 부총리는 기업 구조조정 강공 드라이브를 펼쳤다. 해운업을 중심으로 구조조정 시기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유 부총리는 지난달 20일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구조조정과 관련해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조조정을 위해 필요한 재원 확충 등에 대해서는 발언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구조조정의 실탄(재원)을 언급하기보다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할 실업 등의 사회적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유 부총리는 이 기간동안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해운·조선업 등을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원하거나, 해당 기업들이 많은 일부 지역을 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하는 등의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판 양적완화에 동의를 표한 26일 이후 유 부총리는 자본 확충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유 부총리는 28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기업 구조조정은 시간과의 싸움"이라며 "기업 구조조정에 필요한 국책 금융기관 자본 확충 등 보완 방안은 시기를 안 놓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재정을 통한 자본확충은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대부분 국회 동의를 받아야 했지만 4·13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했기 때문이다. 유 부총리는 지난달 29일 쟁점법안 처리를 위해 국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야당의 부정적인 반응을 직접 확인하고 돌아왔다.
이 자리에서 유 부총리는 '한국판 양적완화가 최우선적이냐'는 질문에 "한국판 양적완화가 어떤 방법이 있을지, 법을 고칠 부분이 있으면 법을 고치기가 쉬운 부분은 아니니까, 여러개 고민하고 있다"고 답했다. 추경편성에 대해서는 "추경편성요건에 안맞을 가능성이 크다"며 부정적 입장 내비쳤다.
이후 유 부총리는 점차 한은 역할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유 부총리는 지난 1일 한 방송사 대담프로그램에 출연, 구조조정의 재원 마련 방법에 대해 "가능한 재정과 통화정책 수단의 조합을 생각해보고 있다"며 "딱 하나의 방법을 쓰기보다는 폴리시믹스(policy mix·정책조합)가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해서는 "구조조정 재원 마련에 있어 유력한 아이디어"라며 "정책조합에 이런 내용이 들어간다"고 밝혔다. 통화정책의 필요성을 직접 언급하며 한은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이어 유 부총리는 ADB총회 참석차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방문한 지난 2일(현지시간) 구조조정 작업을 위한 국책은행 자본 확충에 대해 "통상 재정이 한다"면서도 "환경에 따라 (통화가 우선하는 것으로) 순서가 바뀔 수 있다"며 한은의 역할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 임종룡 금융위원장 "'한국판 양적완화'아닌 자본확충 필요"=임종룡 금융위원장도 한은 역할론을 내세우고 있다. 다만 국회에서 만들어진 '한국판 양적완화' 대신 자본확충에 중앙은행의 역할을 강조하고 나섰다.
당초 임 위원장도 한국판 양적완화가 처음 언급됐던 총선 전에는 "(한국판 양적완화 정책은) 당의 공약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은행에서 결정할 일"이라며 "금융당국 수장이 언급할 사항은 아니다"라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지난달 6일 기자들과 가진 4월 금융개혁 정례 간담회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적절한 시점이 아니라며 "선거가 끝난 후 실현여부에 대해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임 위원장은 총선이 끝난 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임 위원장은 기업구조조정협의체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에 국책은행 자본 확충에 나서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대신 "국책은행의 자본확충은 여당의 총선 공약이었던 '한국판 양적완화'와 다르다"며 "필요한 것은 유동성이 아니라 손실을 분담할 수 있는 국책은행의 자본력"이라고 말해 사실상 두 개념을 구분지었다.
임 위원장은 이후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의 자본 확충에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하는 등의 역할을 맡아달라고 요구했다. 지난달 29일 언론사 경제부장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중앙은행이 국가적 위험요인 해소를 위해 적극적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며 한은을 압박했다. 지난 4일에도 "국책은행 자본확충에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 필요하지만 중앙은행이 위기 또는 전반적인 구조조정 시기마다 필요한 지원을 해 왔다"며 "과거에도 중앙은행이 나선 사례가 충분히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임 위원장이 한은을 압박한 것은 구조조정의 신속성 때문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구조조정을 지연하지 않고 빨리 하려면 신속한 수단이 동원돼야 한다"며 "중앙은행이 필요한 이유는 신속히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재정을 통한 자본확충은 예산 편성, 국회 동의 등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한은은 금융통화위원회만 거치면 빠르게 정책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 한 발언이었다.
◆ '국민적 공감대' 원칙 세운 이주열 한은 총재=논의의 중심이 된 이주열 한은 총재는 처음부터 발권력 동원에 조심스러운 반응을 내비치며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원칙론을 내세우고 있다. 이 총재는 처음 '한국판 양적완화' 논쟁이 정치권에서 나온 직후 "특정 정당의 공약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 "한국은행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만 언급했다.
하지만 총선 이후인 지난달 19일 금통위 기자간담회에서 기업 구조조정과 관련해 "지금은 한은이 나설 상황은 아니다"라고 비교적 분명하게 반대 입장을 내놓았다. 당시 이 총재는 "산업은행이 구조조정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는 데 어려운 상황은 아니라 나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한은은 금리, 통화량 조절, 대출정책 등 여러가지 정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구조조정 등 문제에 대해 중앙은행이 나설 상황이 되면 지금 현재 수단들로 적합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한국판 양적완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이후 한은의 역할론이 구조조정 정국을 휩쓸었지만 이 총재는 "구체적인 요청이 오면 한은이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는 등 원칙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오히려 지난달 29일 윤면식 한은 부총재보가 통화신용정책보고서 기자설명회에서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 재정의 역할을 하려면 국민적 합의와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가능하다"면서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국책은행의 자본 확충은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라고 말해 한은이 사실상 발권력 동원을 반대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이에 이 총재는 지난 2일 집행간부회의에서 "기업 구조조정이 우리 경제의 매우 중요한 과제이며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역할을 적극 수행할 것"이라고 말한 내용을 이례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ADB총회 참석차 방문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이 총재는 4일(현지시간) "기업 구조조정에 발권력을 이용하려면 납득할만한 타당성이 필요하고 중앙은행이 투입한 돈의 손실이 최소화해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원칙"이라며 "손실 최소화 원칙에서 보면 아무래도 출자보다 대출이 부합한다"고 말했다. 발권력 동원에 사실상 난색을 표한 것이다.
이어 이 총재는 발권력 동원 대신 한은이 시중은행에 채권을 담보로 대출하고 은행들이 그 자금으로 자본확충펀드를 만들어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낮은 은행을 다시 지원하는 '자본확충펀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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