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했다던가. 인간사에 할퀴어 너덜너덜해지면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남쪽의 한 섬으로 가야 한다. 섬에 발을 들여놓기까지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하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섬이 주는 위로는 대단하다. 나를 온전히 위로해줄 그런 곳 하나쯤, 있어도 좋다. 그곳이 하늘도, 바다도, 산도 모두 푸른 청산도라면.
여기서 살고 싶어요, 당리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피에르 상소는 ‘느림이란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다’라고 했다. 개미처럼 일하면서 때때로 베짱이의 삶을 꿈꾸기도 했다.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며 베짱이의 삶을 택한 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여전히 개미처럼 살고 있는 나. 그래서 느림의 삶이 공존하는 슬로시티가 한없이 부럽다.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 그레베에서 시작된 느리게 살기는 자연에 대한 인간이 기다림이라 한다. 세계 100여 개의 도시가 동참하고 있는 슬로시티는 우리나라에도 여러 곳 있다.
슬로시티가 아니었다면 좀처럼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지 않았을 남쪽 섬 청산도. 그런데 한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청산도 할머니는 육 남매를 키우느라 미역공장, 마늘밭, 논에서 일하며 평생 허리 펼 날 없이 사셨다고 한다. “손톱 발톱 짓무르게 돈 벌어서 어디다가 달아두고 이만큼 늙었구나”라던 말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섬사람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든 섬은 ‘줄 건 이것밖에 없지만…’이라며 위로라도 하듯 참 기막힌 풍경을 끌어안았다.
유람선이 토해낸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은 당리다. 한여름 가족 여행으로 찾았던 그곳과 일본 친구들과 찾은 봄날의 당리가 내어주는 풍경은 늘 서정이었다. 구불구불한 돌담길은 영화 <서편제>에 의해 알려졌고 유채꽃과 청보리, 코스모스가 피는 언덕 위에는 드라마 세트장이 서 있다. 도락리해변을 따라 드문드문 서 있는 곰솔과 당리 마을의 색색 집들의 풍경은 드보르니크나 포지타노보다 훨씬 사랑스럽다.
아름다운 산천을 담아내는 재주가 뛰어난 임권택 감독은 “당리 일대 논밭에서 일하는 아낙들을 보면서 그들의 애환을 느낄 수 있었는데 꽃길을 거닐며 가슴의 한을 창으로 풀어내는 장면을 연출하는 데 더없이 좋은 분이기였다”고 회고했다던가. 풍경에 취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청산도에는 국제슬로스티연맹으로부터 세계 슬로길 1호로 지정된 슬로길이 있다. 11개 코스에 총 길이는 42.195킬로미터. 가장 정감 넘치는 길은 구들장길에서 다랑이길까지 놓인 6코스다. 열 평을 만드는 데 꼬박 1년이 걸린다는 구들장 논과 배롱나무 뚝방길은 걷는 게 질색인 사람들도 걷게 만든다.
폐교, 느림의 심벌이 되다. '느린섬여행학교'
청산도에는 섬만의 독특한 문화가 남아 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초분. 섬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초분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하였다가 이삼 년이 흐르면 뼈를 수습하여 땅에 묻는단다. 매장이나 화장보다 절차가 복잡하고 돈도 많이 들지만 초분을 지내는 집의 자식은 효심이 있다고 인정한다고. 바람을 막기 위한 돌들이 많은 섬에는 돌을 쌓아 만든 우실무덤도 있다. 앞바다에 돌로 담을 쌓아 두고 고기를 잡는 전통 방식의 독살도 청산도에서는 통용되는 말이다. 밀물 때 돌담 안으로 들어온 고기는 썰물 때 나가지 못하니 꼼짝없이 잡히고 만다.
독특한 섬 문화와 느림의 미학이 살아 있는 섬에서 섬을 더욱 귀하게 가꾸는 곳이 있다. 느린섬여행학교다. 2009년에 폐교된 청산중학교를 숙박동과 체험관 등을 갖춘 느림학교로 고쳐 문을 열었다. 휘리그물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는 휘리 체험이나 청산도의 슬로푸드 체험을 진행하며 청산도의 음식 맛을 섬 밖 사람들에 보여준다.
예전에는 ‘속 모르면 청산에 딸 시집보내지 말라’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바지락을 캐고 짬이 날 때마다 다랑이 밭을 일궈도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는 사람들. 그들이 맛보던 음식을 느린섬여행학교에서 아침밥으로 먹었다. 학교에서는 청산도에서 나고 자란 재료만 사용하여 건강밥상과 느림밥상, 남도밥상, 네 명 이상 예약을 해야 하는 슬로푸드 정식을 내놓는다. 건강밥상은 톳밥과 해조류 된장국에 고등어구이, 기본 찬 다섯 가지와 해조류 반찬 두 가지로 차려졌다. 여기에 전복찜이 더해지면 느림밥상이 된다.
가장 흥미로운 음식은 청산도탕이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그 탕이 아니었다. 해물을 잘게 썰어 잡곡가루와 함께 끓여 만드는데 탕이라기보다는 아주 걸쭉한 죽에 가까웠는데, 섬사람들이 제사상에 올리는 귀한 음식이라고 했다. 반찬을 몇 번이나 더 달라 했더니 흔쾌히 갖다 주었다. 함께 아침을 들던 일본 친구들이 새삼스럽게 놀랐다. 물 한 잔도 따로 주문해야 하는 유럽이나 불고깃집에서 상추와 김치도 따로 주문해야 하는 일본식 계산법을 떠올리면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초코파이(情) 시스템이다.
Infomation
완도군청 관광정책과 061-550-5151 http://tour.wando.go.kr
가는 길 완도여객선터미널에서 청산도 도청항까지 여객선으로 45분 정도 소요,
하루에 6~7회 운항 (완도여객선터미널 061-550-6000,
청산농협 061-552-9388, http://island.haewoon.co.kr).
당리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 청산로 72번길 67(슬로쉼터)
느린섬여행학교 061-554-6962 www.slowfoodtrip.com 전남 완도군 청산면 청산로 541
글=책 만드는 여행가 조경자(http://blog.naver.com/travelfoodie), 사진=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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