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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자기 손가락을 자르며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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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자기 손가락을 자르며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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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경북 영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남자현에게 '여자 안중근'이란 별칭을 붙여준 것은, 필자이다. 대구 지역의 모 일간신문과 서울의 모잡지에 그녀의 행적을 발굴하는 기사를 쓰면서 이 분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끝에 찾아낸 말이다. 그녀는 안중근의사처럼 손가락을 잘라 의기를 표현한 것이 세번이나 되었다. 그리고 하얼빈에서 일본제국의 전권대사였던 부토를 처단하기 위해 거사를 꾸미다 잡혀 단식 끝에 돌아간 분이다. '여자 안중근'이란 이름이 전혀 손색이 없는 위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사 이후로 이 분에 대한 나의 관심과 심정이 각별해진 나머지 몇 해 전에 <남자현평전 - 나는 조선의 총구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한때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열연한 여성독립운동가가 남자현을 닮았다는 소문이 퍼져, 네티즌들이 그 이름을 검색하는 열풍이 불기도 했다. 내가 '감식'한 결과, 영화감독이 남자현을 접하지 못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낸 이후, 광복절이나 연말이 되면, 방송을 비롯한 언론사에서 꽤 자주 인터뷰나 취재 관련 요청이 들어온다. 이 분에 대해 다루고자 하는데, 자료나 취재원이 워낙 빈약해 내게 지푸라기라도 잡듯 SOS를 보낸다. 광복 직후 독립운동을 결산하는 자리에서 여성으로서는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 분에 대해 국가나 후손들이 이토록 무관심한 것은 정말 기이할 정도다.


그 분이 생에서 '위대한 결단'을 내리는 두 변곡점에서, 의병으로 잃은 남편의 유복자인 귀한 아들에게 남긴 편지를 당시의 정황들을 찾아 가상으로 재구성한 글을 올려, 이 아름다운 여인을 다시 상기해본다.

# 무명지를 자르며 (1932년 9월17일)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오늘 왼쪽 무명지(네번째 손가락) 두 마디와 이별하려 한다. 이름이 무명지(無名指)라 한들 어찌 쓸모 없는 손가락이겠느냐. 제 나라를 잃고 무명민(無名民)이 되어 떠도는 나보다는 실한 것이느니. 어쩌면 평생을 가만히 붙어 내 손을 채웠던 이 작은 것이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도 있겠다 싶구나. 중지(中指)와 약지(弱指)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여기도 붙었다 저기도 붙었다 살아온 줏대없음을 논죄하는 준엄한 심판이 아니겠느냐.


아들아, 오늘 문득 하얼빈 남강의 어느 중국인 음식점에서 가만히 내 왼손을 들여다 보나니, 성경에 나온 대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 수 없을 만큼 쥐도새도 모르게 처리해야할 일이 있구나. 며칠전 국제연맹에서 일제의 만주 침략 현장을 조사하는 대표단을 파견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서럽고 아픈 이 나라의 뜻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더냐.


우리는 일제의 지배를 원하지 않으며 독립국가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준다면 세계에서도 여론이 생겨나지 않겠느냐. 일본은 우리의 입을 틀어막고 우리가 마치 그들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세상을 속이고 있지 않더냐. 오늘 이 무명민의 무명지가 비로소 제 할 말을 할 것이다.


내 아들 김성삼아. 너는 36년전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영주는 훌륭한 분이셨지. 네 외할아버지 남정한 통정대부의 아끼는 제자이기도 하였단다. 우리는 열한살의 나이 차이를 아름답게 여기고 혼인을 하였지. 유학자 집안의 둘째 딸이었던 나는, 오라버니처럼 듬직한 네 아버지가 무척 좋았단다. 진보의 홍구동을 흐르던 반변천이 피개울이 되던 여름, 네 아비 김영주는 의진(義陣) 속에서 두려움 없이 싸우다가 눈을 감았단다. 을미의병이 창의하던 1896년이었지. 그 전해 10월 일제가 경복궁 건청궁을 감히 침입해 명성황후의 심장을 찌르지 않았겠느냐. 이 나라 국모를 무참히 시해한 일을 '늙은 여우'를 사냥했다고 한다니 천하의 몹쓸 것들이 아니냐. 의로움을 귀히 여기던 아버지는 분연히 일어서서 토역(討逆)의 선봉에 뛰어들었지.


이후 네 아비의 부음을 들었다. 나는 너를 밴 몸으로 실성한 듯 개울로 뛰어들어 석보의 친정에서 전장(戰場)이었던 진보로 건너가려 했단다. 아버지는 무너지는 근대사에서 학의(鶴衣)를 걸치고 온몸으로 옳음을 지키려 했던 아름다운 투사였다. 그 사람은 첫날밤 어린 신부인 내게 내 성씨인 南자를 새긴 옥가락지를 끼워주었지. 만주에 오면서 그 가락지를 벗어버릴 수 밖에 없었지만 가끔 나는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가락지 자국을 어루만지며 그때를 그리워하곤 했지. 가락지에 글자를 새기던 그 마음도 희미한 자국도 오늘 마침내 끊어지겠구나. 나라를 위해 죽었던 그 사람의 자국을 다시 잘라내, 나라를 살리려 하나니, 이날은 그런 날이구나.


아들아, 이제 칼을 가지고 왔다. 내 손가락이 먼저 알고 피가 뛰는구나. 이것을 잘라 모레 국제연맹 조사단장인 리튼에게 전할 것이다. 지금 내게 두려운 것은 없다. 나라를 잃었고, 남편을 잃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궁벽한 영양 땅 선비의 여식으로 태어나 사서삼경을 읽으며 자란 나는, 네 아버지를 잃었을 때 맹세했다. 너를 훌륭히 키우고 시부모의 봉양을 무사히 마친 이후에, 홀연히 떠나 남편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원을 세웠다. 25년 동안 나는 봉건적인 가정 안에서 묵묵히 여자의 일을 다하였다. 관청에서 이런 일을 칭찬하여 효부 표창을 내렸지. 우습구나, 나라도 없는 몸이 효부라니.


삼일운동이 있던 1919년에 나는 고향을 떠났다. 교회의 인맥을 타고 서울로 가서 우선 내가 할 일을 찾아나섰지. 마침 만세운동이 일어나 내 피를 뜨겁게 했어. 서울 남대문동에 있는 여성동지 김모가 내게 비밀편지를 보냈지. 연희전문학교 부근 교회당에서 비밀회의를 갖고 이날 오후 3시에 독립선언문을 뿌리고 다녔지. 이런 일이 있고나자 일제경찰의 감시가 더없이 심해지더군. 활동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어. 그래서 만주로 가기로 했다. 그곳엔 안동 출신의 김동삼선생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거든. 네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분이라, 우선 그쪽으로 연락을 취했어. 그가 참모장으로 있던 서로군정서에 입단한 것도 그때였고...기억 나니? 그때 안동에 있던 너를 이곳으로 불렀지 않느냐? 네가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을 하던 날 어미는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늙어서 그런지 가끔 옛 기억들이 이렇듯 쏟아지는구나. 내 나이가 벌써 육십이다. 양반가의 할머니가 독립운동을 한다? 일견 우습게도 들릴 일이지만, 현실은 그런 모양을 가릴 때가 아니다. 이 늙어가는 육신의 일부를 끊어, 절규를 내놓아야할 때도 있는 법이 아니냐? 이제 칼을 들었다. 영양 산골에서 자라난 푸른 초목같은 육신의 한 가지를 잘라내어, 이 몸이 살아있음을, 이 나라의 백성이 아직 피를 철철 흘리며 살아있음을 보여야겠다. 나, 남자현의 무명지. 세상을 위해 날아가거라. (.......)


내 오른손가락이 왼손가락을 들었구나. 피를 뚝뚝 흘리는 무명지를 붓자루처럼 들고, 이 겨레붙이의 소원을 한번 적어보려 한다. 대한독립원(韓國獨立願)! 한국은 독립을 원하오! 이제 이 잘린 손가락을 혈서와 함께 리튼에게 보내리라. 한국 여성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도 함께 보내야겠다. (이 혈서는 아쉽게도 삼엄한 감시에 막혀 전달되지 못했다. 남자현은 인력거꾼에서 대양1원을 주어 전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그것도 실패했다고 1933년8월26일자 <조선중앙일보>가 보도하고 있다.)


# 하얼빈 감옥, 단식, 그리고 임종 앞에서(1933년 8월22일)


아들아. 나는 괜찮다. 울지 말아라.


나는 허수아비 만주국을 세운 일제가 중국 전체를 삼키려고 침을 흘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만주에서 일제의 간판이라 할 만한 부토 전권대사를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은, 나라 잃은 민족으로 저들의 끝없는 야욕에 쐐기를 박으려는 결심이었다. 거사일은 만주국 수립1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1933년 3월1일로 잡았다. 우리로 말하면 독립만세운동 14주년이 되는 날이었지.


1월에 부하 정춘봉과 중국인 몇이 모여 무기 조달에 관해 논의를 했단다. 우리는 권총 한 자루와 탄환, 그리고 폭탄 두 개를 준비하기로 했다. 이달 27일 오후 4시 남강 길림가 4호 푸른 대문앞에 표시한 붉은 천이 암호였고 무기가 든 과일상자를 건네받기로 했어. 2월에 나는 어느 사진관에 가서 최후 기념사진을 찍었지. 죽게 되면 이 사진이 남아 지상을 돌아보고 있으리라. 내 눈을 한번 들여다봐. 유난히 아래쪽에 흰 자위가 많아서 날카로워 보이니? 아마 오랜 분노가 쌓여 저절로 이런 표정이 되지 않았나 싶어.


2월23일 오전 10시에 거사 장소를 한번 확인한 뒤에, 노파로 변장해서 무기와 폭탄을 운반했어. 그런데 나흘 뒤인 27일 하얼빈 한 거리에서 갑자기 일제경찰이 덮친 거야. 누군가의 밀고가 있었을 거야. 나는 하얼빈 주재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여섯 달 동안 온갖 고문을 받았지.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어. 이렇게 욕되게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항거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결단이 서자 마음이 평안해졌어. 일본이 주는 음식을 개처럼 받아먹지 않겠다. 9일을 단식하니 죽음이 가까이 오는 듯 하더군. 8월17일 오후 1시30분에 일제는 초주검이 되어있는 나를 병보석으로 풀어주었지. 나는 너와 손자(김시련)를 만나기 전에는 죽을 수 없었단다.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 일본 경찰은 나를 풀어주고도 숨을 거뒀는지 확인하러 수시로 들락거리고 있더군.


내가 하얼빈 적십자여관을 거부하고 굳이 조선인여관으로 보내달라고 고집한 것은, 고향이 그립기 때문이다. 고향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고 싶구나. 1927년 길림사건이 문득 생각난다. 안창호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 지도자 47명이 중국 관원에 검거되어 일제에 넘겨질 뻔했지. 그때 위기를 해결하느라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나네.


어쨌든 저 사람들을 내보내다오. 그리고 물을 좀 가져오너라. 몸을 좀 닦고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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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이 행낭을 받아라. 여기엔 2백49원80전이 들어있다. 그중 2백원은 조선이 독립되는 날 독립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갖다 바쳐라. 남은 돈 49원80전의 절반은 손자 공부하는데 써라.(이것은 실제로 아들 김성삼이 해방 직후, 김구와 이승만에게 공식적으로 전달했다) 대학까지 공부시켜 내 뜻을 알게 하여라. 나머지 반은 친정의 증손자에게 주어라. 내가 굶어죽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사람이 죽고사는 건 안먹고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에 달려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조국아. 이제 잃어버린 무명지를 찾으러 가야겠다. 자는데 깨우지 마라.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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