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영국 BBC는 3D 프린터로 권총을 만들어 발사하는 장면을 보도했다. 이 총기는 코디 윌슨이라는 25세의 대학생이 1년간 연구 끝에 만든 것으로 총의 대부분은 플라스틱 재질로, 격발 장치인 공이만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무정부주의자인 윌슨은 한술 더 떠 권총 제조 설계도를 인터넷에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개인도 온라인쇼핑몰에서 판매하는 3D 프린터만 있으면 누구나 총기를 만들 수 있는 '전인류 무장'의 시대로 돌입했다.
총기만이 아니다. 3D 프린터는 아마추어나 오타쿠(한국에서는 오덕후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불리는)의 피규어 제조놀이를 넘어 우주항공이나 의료, 자동차 같은 제조업 전반을 쓰나미처럼 덮치고 있다. 불길한 것은 한국이 이러한 산업 쓰나미에서 후진국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아직 그 위기조차 실감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중세만 해도 유럽은 '야만의 국가'에 불과했다. 컬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황금의 나라 인도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발견한 미국 신대륙을 콜럼버스는 인도로 착각했고, 여기에 사는 미국 원주민을 인도인이라는 의미의 인디언으로 불렀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선진 문물의 산지였던 동양에 대한 찬사와 부러움으로 덮혀 있다. 오죽하면 마르코 폴로의 별명이 '일 밀리오네(백만)'였겠는가. 그가 동양을 설명할 때 입만 열면 백만이라는 단위를 불렀기에 주변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한다.
그런 유럽이 18세기 산업혁명을 거쳐 제국주의로 진화하면서 글로벌 패권을 쥐게 된다. 영국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을 기반으로 가장 먼저 산업화를 시작했고 프랑스, 독일 그리고 후발국 미국까지 앞을 다투어 아시아,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독립한 아시아 국가들이 제조업을 중심으로 이들 국가들을 추격, 마침내 제조업에서는 관계를 역전시켰다.
일본에 이은 한국과 중국의 급부상은 영국 수상 대처조차 제조업은 끝났다는 항복 선언을 하게 만들었다. 영국 제조업의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제조업 비중이 1970년 30%에서 2011년 11%로 하락했다. 2011년 이 비중은 한국이 28%, 중국 34%이다. 최근 중국의 급부상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촉진했다. 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G2로 불리며 미국에 버금가는 강대국으로 대두했다. 적어도 제조업의 패권은 서구에서 아시아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3D 프린터의 등장은 이러한 제조업 패권의 이동을 되돌리려 하고 있다. 3D 프린터는 1차 산업 혁명의 원동력이 됐던 증기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를 두고 '3차 산업혁명'이 시작됐다고 평가한 바 있다.
산업혁명의 본질은 '크래프트맨(장인) 생산 방식'에서 '기계제 대량 생산 방식'으로의 이행에 있다. 그런데 3D 프린터는 대량생산을 다시 장인 생산으로 되돌릴 수 있는 도구이다. 더구나 3D 프린터는 정보기술(IT)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장인의 노하우를 기계에 체화시켜 놓았다. 사용하는 개인은 단지 디자인을 선택, 출력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3D 프린터는 싼 임금이나 제조원가보다 이론 그대로 '저스트 인 타임(적시공급)' 이 더욱 중요하게 된다.
더 위험한 것은 3D 프린터가 요구하는 산업능력이다. 3D 프린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디자인과 설계능력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능력은 여전히 서구와 일본이 독점하고 있다. 실로 3D 프린터가 초래하는 위기의 실체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작년에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두고 '소테이가이(예상 밖)'라고 답변, 호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일본 정부의 입장이 완전히 비상식적인 말은 아니다. 후쿠시마 원전은 8m급 쓰나미를 상정하고 방파제를 만들어 놓았다. 사실 정부 공무원이 15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10m 이상의 대형 쓰나미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예산 낭비라고 비난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15m급의 쓰나미가 덮치면서 후쿠시마는 초토화됐다.
지금 다가오는 3D 프린터는 한 국가를 넘어 동양과 서양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거대한 쓰나미가 될 것이다. 한국은 준비돼 있는가.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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