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에 대한 담론이 뜨겁다. 예전과는 다르게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논의가 활발하다. 고무적이다. 북한 도발과 합의, 박 대통령의 방중(訪中)이 국민들에게는 신선한 자극제가 됐다. 힘든 일을 겪고 난 후 부쩍 성장하듯 우리 국방도 외교도 더욱 단단하고 강해진 느낌이다. 경제는 대외적인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주가나 환율 등에서 다른 신흥국과는 차별화되며 자못 안정적이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에서 정부는 대북 원칙을 일관되게 고수했고 통일 외교에서도 주변 정세를 주도하며 공감대를 확산해 나가고 있다. 지난달 북한의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매설로 고조된 남북 긴장 분위기는 포격 도발로 정점에 이른 후 고위 당국자 간 마라톤 협상 끝에 극적인 '8ㆍ25 남북 합의'라는 결실을 맺었다. 우리 국민에게는 실로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이었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원칙에 기반한 정부의 일관된 대응으로 북의 떼쓰기 전략에 경종을 울렸고 위기 속에 보여준 우리 국민들의 강한 결속력 또한 큰 소득이었다.
연이은 박 대통령의 중국 전승 행사 참여는 한국 주도의 통일 외교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중국으로부터 '한민족에 의한 평화 통일 지지'를 공개적으로 이끌었고 '한ㆍ중ㆍ일 3국 정상회담의 제기'로 동북아시아 안보에 주도적인 목소리를 냈다. 또 시진핑 주석과의 단독 오찬, 열병식의 자리 배치 등 파격적인 의전에서도 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엿볼 수 있었다.
한국사의 궤적을 좇다 보면 우리 민족의 운명을 가른 역사적인 순간들을 조우하게 된다. 역사 기록이 확실하지 않은 고조선 등은 차치하고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는 다르지만 우리의 힘으로 주변 정세를 주도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신라는 7세기 유연한 외교력을 바탕으로 당대 세계 최강이던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 통일을 이뤘다. 비록 외세의 힘을 이용했지만 이후 백제ㆍ고구려 유민과 함께 당나라를 몰아내며 1000여년의 찬란한 역사를 남겼다.
고려는 호국 불교를 근간으로 자주 국방에 힘쓴 결과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다. 거란과의 전쟁은 주변 정세를 정확히 간파한 서희의 외교 담판과 국방을 강화한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으로 완승을 거뒀다. 또 몽골과의 40년에 걸친 기나긴 전쟁에서는 김윤후(승장)의 처인성 전투, 팔만대장경 조성 등 백성들이 스스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기에 굴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반면 조선 시대는 중국에 대한 의존 심화와 숭유억불 정책으로 국력은 약화됐고 주변국과의 외교에서도 주도권을 잃게 됐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을 강화 협상이 진행됐지만 어처구니없게도 협상의 당사국은 조선이 아닌 명나라와 일본이었다. 명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주의는 병자호란도 불렀다.
한국 현대사의 시발점인 광복은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찾아오지만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의 양해(?) 아래 38선을 경계로 남북한 별도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우리 민족에겐 분단이라는 굴레가 씌어졌다. 분단은 6ㆍ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게 되고 정전협정 또한 미국과 중국의 주도 아래 한민족의 분단을 강화했다.
역사는 힘없는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오롯이 보여준다. 작금의 국제 정세도 그리 다르지 않다. 한반도를 둘러싼 미ㆍ중ㆍ러ㆍ일 강대국들의 첨예한 이해관계는 여전하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민족의 소명인 남북통일 문제도 그 울타리를 벗어나서 생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의 교훈처럼 원칙은 분명히 있어야 한다. 우리 힘으로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된 통일이 돼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힘으로 이뤘을 때 통일은 대박이다. 이산가족에게는 기약 없는 기다림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책이며 고령화와 비좁은 내수시장으로 저성장의 늪에 빠진 경제에는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커진 영토와 경제력에 걸맞게 외교력의 영역도 확대될 것이다. 그날이 기다려진다.
이산가족 상봉과 한미 정상회담이 곧 있을 예정이다. 우려의 목소리가 높지만 필자는 오히려 기대가 된다. 그 어느 때보다 국력은 강하고 국민들의 '한국 주도 통일'에 대한 지지도 탄탄하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다. 우리 힘으로 주변국의 지지도 북과의 신뢰 회복도 이뤄 내리라 믿는다. 집무실의 창밖으로 정동이 눈에 들어온다. 정동은 구한말 외세에 휘둘린 한없이 아픈 역사가 아로새겨진 장소다. 명성황후 시해 후 고종은 정동의 러시아 공관으로 피했고 일본에 의해 외교권을 잃은 을사늑약은 정동에 위치한 덕수궁에서 체결됐다. 우리 힘으로 통일이 돼 정동에 서린 울분도 조금이나마 치유됐으면 좋겠다. 그때 다시 정동길을 걷고 싶다.
김주하 NH농협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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