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 올해 20주년을 맞은 대형 뮤지컬 '명성황후'가 또 다른 20년을 향해 나아간다. 작품은 대대적인 변화를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눈길이 가는 부분은 캐스팅이다. 명성황후를 연기하는 배우는 김소현(40)과 신영숙(40). 두 사람은 국내 뮤지컬계에서 높은 가창력과 연기력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되기까지의 여정, 음색, 이미지는 놀랄 만큼 다르다. 윤호진 연출(67)은 "자신만의 개성이 워낙 강한 배우들이기에 관객은 전혀 다른 느낌을 경험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김소현은 앳되고 약해 보이는 명성황후를 점점 강한 면모로 변화시키고, 신영숙은 무대 초반 강한 이미지를 억누르다 마지막에 이르면 진짜 힘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김소현과 신영숙을 지난 3일과 4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차례로 만났다. 김소현이 '명성황후' 역을 맡기로 했을 때 뮤지컬계 안팎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얼굴과 큰 눈이 돋보이는 서구적 외모, 여린 음색으로부터 나오는 여성미가 기존의 '명성황후'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던 탓이다. '엘리자벳'과 '마리 앙투아네트' 속 가녀린 김소현에 카리스마 있는 왕비를 덧대는 건 어색한 일이었다. 그래서 망설였다. "여성스럽고 우아한 역할을 오랫동안 해서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년 동안 이 역을 맡은 이태원 선배님은 명성황후를 카리스마 있는 인물로 그려냈다. 고정관념을 깨기가 어려워 보였다."
윤 연출은 "김소현 만의 명성황후를 연기하라"고 했다. 두 달간 이어진 설득에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욕먹을 각오도 했다. 극복해야 할 것은 이미지뿐이 아니었다. '명성황후' 속 뮤지컬 넘버들은 메조소프라노를 위한 곡이다. 그는 하이소프라노. "음색 레슨을 많이 받았다. 스스로 '너무 남자같이 내는 거 아니야?' 할 정도로 많은 변화를 시도했다." 낮은 음역대에서도 전달력을 높이려고 발음에 더 신경 썼다. "'구중궁궐' 같은 고어(古語)들이 많이 등장한다. 첫 공연 뒤 잘 안 들린다는 관객의 지적을 듣고 더 열심히 발음을 씹고 있다." 가방에서 꺼내 보인 수첩에는 리허설과 본 공연에서 부정확하게 들린 단어들이 빼곡했다.
캐릭터의 기본 골격은 이어가되 자신만의 명성황후를 보여줘야 했다. "여성스러움과 모성애를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을 많이 찾았다. 카리스마가 부족하니 내면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책이나 드라마, 인터넷을 뒤졌다. 명성황후는 역사적으로 논란이 많지만 참 불쌍하고 안타까운 인물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이가 항문 없이 태어나 금방 죽기도 했다." 인간적 면모를 띄는 명성황후를 그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출에 제안도 했다.
신영숙이 2015년 '명성황후'가 된 스토리는 더욱 극적이다. 그는 1999년 '명성황후'로 뮤지컬계에 발을 들였다. 당시 왕비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손탁'을 연기했는데 16년이 흐른 지금 신분상승한 셈이다. 윤 연출은 신영숙이 신인시절 "대표님, 전 커서 명성황후가 될 거예요"라고 한 말을 기억했다. 그는 16년이 지나 실력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신영숙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신영숙은 "손에 닿지 않을 꿈같은 이야기였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며 "그 큰 오페라 극장이 4층까지 꽉 차 있는데 '이 자리에 내가 서 있다니' 싶어 감개무량했다"고 했다. "우연하게도 지금 손탁 역을 맡은 친구가 명성황후 커버다. '열심히 준비해 놓으라'고 했다. 앙상블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같아 기쁘다."
그는 원래 메조소프라노인데다 카리스마 있는 역을 소화해왔다. 소리를 낼 때 큰 어려움은 없다. 얼마 전 막을 내린 '팬텀'에서도 마담 카를로타 역을 맡아 두성과 흉성을 자유자재로 뽐냈다. 하지만 손짓과 몸짓 사용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 답답했다. "전통 뮤지컬이라 움직임이 많지 않다. 오로지 소리로 감정을 전달해야 하니 그게 가장 힘들었다. 어떻게 하면 관객들에게 더 잘 닿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내 마음 속에 명성황후를 오롯이 담고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공연 전에 항상 한다."
'여성적으로 변모한 명성황후', '역대 카리스마를 잇는 명성황후'. 두 배우를 수식하는 단어는 이렇듯 다르다. 하지만 마지막 곡 '백성이여 일어나라'를 무대에 올릴 때 느낀 벅찬 감정은 다를 수 없다. 혼백이 된 명성황후는 백성 수십 명과 함께 관객을 향해 다가오며 이 노래를 부른다. "동녘 붉은 해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 하리. 조선이여 무궁하라. 흥왕하여라." 김소현은 "집중하고 모든 걸 쏟아 붓지 않으면 안 되는, 몸이 조각나는 듯한 힘이 필요한 장면이다"며 "뮤지컬 배우로서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축복"이라고 했다. 신영숙 역시 "눈물을 참기가 힘겹다"면서도 "내 마음 가는 대로 노래하면 무대를 다 망칠 수 있기에 억누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9월10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임온유 기자 ioy@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