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기획, 사람으로 보는 금융사회학⑤자존심도 벗고나가라, 은퇴뱅커의 노후…보일러기사·은행 청원경찰로
[아시아경제 구채은 기자] "자존심을 버리세요!"
30년 은행밥을 먹고 퇴직을 앞둔 A은행의 박문수 부장(가명ㆍ53세)은 강연자의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얼마 전 참석한 은행원 퇴직자 교육 프로그램에서다. 강연자는 전직 지점장 선배였다. 그 선배는 은퇴 후 은행 행낭 배달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다. '갑'에서 '을'로 졸지에 신분이 바뀐 그는 "새로운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인생의 2모작을 잘 준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박 부장은 젊음을 바쳤던 '뱅커'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과거 은행원은 퇴직하면 '꽃가마'를 타고 나갔다. 고위 관료의 전관예우에는 못 미치지만 '돈을 만졌던 이력'에 걸맞는 영전의 기회는 숱했다. 중소기업 감사 등으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은 꿈같은 얘기다. 이제는 퇴직하면 '수레'를 끌고 간다. 그 수레에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 실려 있다.
그래서 더더욱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엊그제까지 지점장으로 직원들을 관리하고 통솔하다가 그 지점의 청원 경찰(로비매니저), 보일러 기사, 행낭 배달 기사로 재취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마저도 경쟁이 치열하다. 우리은행은 은퇴자 중 10여명을 올초 청원경찰로 재취업시켰다. 국민은행에선 지점장을 지낸 사람이 그 지점의 보일러 기사로 돌아왔다. 후배들은 만감이 교차한다. 시중은행 B 부장은 "가스총 들고 은행강도를 막아야 하는 게 청원경찰인데 나이 지긋한 은퇴 선배들이 총을 찬 모습은 낯설다"면서도 "그래도 은행이니까 2모작을 지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은퇴를 고려할 나이가 된 은행원들은 두 가지를 놓고 저울질한다. 임금피크제를 받아들이거나 그 전에 떠나거나. 시중 은행의 정년은 60세, 55세부터 임금피크제가 시작된다. 은행들은 만 55세가 되는 직원들을 후선으로 배치한다. 그런 처분을 그냥 견디면서 60세까지 일할 수도 있다.
아직 일할 수 있을 때 희망퇴직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선택이다. 은행들도 '역삼각형' 인력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희망퇴직 프로그램을 적극 운영한다. 국민은행은 임금피크 직원에게는 최대 28개월 이내, 일반직원은 기본 30개월에서 직급에 따라 36개월(3년) 이내의 특별퇴직금을 지급한다. 외국계 은행에 다니는 이모 행원(40세)은 "조금이라도 젊을 때 인생 2막을 준비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작년 말 희망퇴직을 신청했는데 심사과정에서 탈락했다"며 "경력 15년인 퇴직 기준인데 희망퇴직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을 보면 나같은 생각을 하는 행원들이 많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보험사 등 동종업계로 성공적으로 이직하는 사례도 있다. 지난해 말 명예 퇴직한 50대 초반 시중은행 지점장 출신 C씨는 지난달 보험사 신입 기업재무 컨설턴트에 지원했다. 심층면접을 통해 선발된 뒤 이달부터 기본 설계사 교육과정과 기업재무 컨설턴트 전문과정 교육을 받고 있다. 다음달부터는 법인 기업들을 상대로 재무 컨설턴트 영업을 시작한다. 50대 중반 시중은행 지역본부장 D씨도 방카슈랑스(은행에서 판매하는 보험) 영업을 강화하려는 보험회사에 취직에 성공했다.
연봉은 은행 근무 시절의 25% 수준에 불과했지만 의욕을 되찾았고 우수한 실적도 올렸다. E은행 부행장은 "예전에는 지점장까지 가면 '명예로운 퇴진'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철저한 준비와 계획 없이는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며 "과거의 프리미엄이 사라진 지금, 대한민국 은행원으로 산다는 것은 대한민국 평균 직장인의 애환을 안고 살아간다는 의미"라며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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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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