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울에서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동네 중의 하나는 아마도 '북촌(北村)'으로 불리는 곳일 듯하다. 나도 이곳엘 요새 꽤나 자주 가게 되는데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만난 북촌 사람들은 밖에서 본 것과는 다른,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북촌을 진짜 북촌이게 하는 한 풍경을 빚어내고 있었다.
그곳에는 무엇보다도 서로 배우고 가르치고 성장시키며 '학당(學堂)'을 가꾸는 이들이 있었다. 노소와 남녀를 떠나 다만 '학생(學生)'으로 진정한 의미의 학연을 맺은 그들은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정진으로써 그 좁은 방을 어느 강당보다 넓은 지식의 전당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그 열기로써 사방 중 봄이 가장 늦게 오는 북촌에서 도리어 가장 일찍 봄을 맞고 있었다. 그들은 이를테면 정신의 새벽을 여는 이들인 것인데, 마침 1500년 전 원효(元曉) 스님을 오늘에 불러와 그 대승의 세계 안에서 서로의 도반이 되려 하고 있었다. 원효라는 이름부터가 새벽이며 깨달음이었듯 하루의 처음을 여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들 자신이 도시의 효(曉)이며 새벽이었다.
이런 교실, 이런 학생들이 어디 이곳뿐이겠는가. 북이 아니라 동서남쪽 어디에건 그런 학당이 있고 교실이 있을 터이며 학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과의 교섭이 각별했던 것은 그곳, 그러니까 권력자와 왕족들의 땅이었던 그곳의 뒤편에 이런 공간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으로써 동쪽과 서쪽과 남쪽의 대문에 각각 인의예(仁義禮)를 붙이면서 북쪽의 대문에는 백성이 지혜로워질 것을 꺼려 기어이 본래의 지(智) 대신 '편안할 정(靖)'이라 써 붙였던 권력자들의 의도를 비웃듯 곧추세운 이성으로 서늘한 이지(理智)의 북풍을 아래쪽으로 내려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북촌의 학당에 모인 이들이야말로 이 마을 왼쪽 경복궁 속의 집현전을 잇는 오늘의 학사들이며 오른편 창덕궁 속 규장각을 재건하는 현대의 검서관들이 아니겠는가. 200여년 전 정조의 죽음과 함께 사실상 죽어버린 조선의 정신사적 맥을 되살리는 다산과 그 벗들의 죽란시사(竹欄詩社)와 같은 결연(結緣)이 아니겠는가.
그런 학연과 결연으로써 비로소 북촌은 복원을 넘어서 보전되며 보전을 넘어서 재생되는 것이리라. 그리고 거기에 과거와 전통의 재생을 넘어서 오늘 서울의 진정한 주인이며 시민의 면모가 있을 터이다. 나들이철 북촌을 찾는다면 고궁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궁궐과 전당을 함께 발견해 보기를.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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