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변신이 무죄라면 남자의 변신은 생존인가.'
A의 말을 듣는 순간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에 팍 하고 박혔다. '무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존'이라는 단어가 주는 비장함이다. 며칠 전 점심식사 자리에서 만난 A는 외국계 금융사의 한국지사 대표다. 젊었을 적 금융권에 몸담아 줄곧 한 우물을 팠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사장자리까지 올랐으니 성공한 인생이다. 그런 그가 딱 한번 외모에 변화를 준 적이 있다. 아주 젊었을 적부터 하얗게 센 머리가 원인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조조정의 광풍이 몰아치던 90년대 말. A가 다니던 회사도 퇴출 바람이 거셌다. 진짜 노땅, 중간 노땅, 어설픈 노땅들이 모두 퇴출 1순위에 오르내렸고 그 순위에서 탈출하려고 머리를 염색해 젊어 보이려는 동료들이 급증했으며, A도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하얀 머리를 까맣게 물들였던 것이다. 염색이 기적을 일으켰는지 A는 결국 살아남았다. 다만 얼마간 검은 머리가 다시 하얗게 될 때까지 생존의 흔적을 묵묵히 지켜봐야 했다.
여기 또 다른 변신이 있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후배 B를 얼마 전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까마득히 몰라볼 뻔 했다. 파마에 염색까지 거의 환골탈태 수준이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외모가 사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친구와 동료들의 권유가 발단이었다. 그래서 변신 후 사업은 잘 되고 있을까. B는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만 긁적였다.
남자도 화장을 하는 시대에 파마와 염색(새치 염색이 아닌 멋내기 염색) 따위가 대수는 아니다. TV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꽃중년의 영향 탓인지 '아저씨'를 거부하는 노무족(NoMUㆍNo More Uncle)이 늘어난다. 조선시대에도 관직에 오르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있었다. 생긴 것, 말하는 것, 쓰는 것, 판단하는 것 가운데 으뜸은 생김새였다. 좋은 인상이 대접받는 세태는 시대를 초월한다.
다만 꽃중년에 대한 심리학자들의 해석은 서글프다. 정글 같은 사회에 대한 불안감, 승진에 대한 불확실, 노화에 대한 거부감, 후배들에 대한 두려움…. 이런 현실적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헤어스타일에 힘을 주고 패션에 공을 들인다는 것이다. 그래서라도 만족할 수 있다면. A처럼 생존을 위한 것이든, B처럼 실적을 위한 것이든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무지개색 염색이 대수랴. 자식을 위하고 가족에 봉사하는 일인데 꽃단장이 별건가. 그러니 남자의 변신은 격려받아 마땅하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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