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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학의 시인, 초등 졸업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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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중학 학력인정 문자해득교육 프로그램' 이수자들 특별한 졸업식…서울시내 50~80대 500여명 한글 배우며 詩쓰기반 등 참여 "죽을 때까지 이 기쁨 놓지 않겠다"

[아시아경제 이윤주 기자]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하면 남편 말 안 듣고 가정이 불화해진다고 공부를 못하게 학교도 안 보내고 집에서 이름 석 자만 가르쳐주셨다. 그렇게 자라면서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여성도들의 모임인 여전도회에서 나보고 서기를 하라고 추천을 했다. 앞이 캄캄했다. 집에 와서 엉엉 울었다. 결국은 서기를 내놓고 말았다."


홍양순(69)씨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다른 사람들은 서기 역할을 하기 싫어 꾀를 부린다고 뒷말을 했다. 하지만 글을 써야 한다는 두려움에 눈물 흘렸던 그날의 말 못할 아픔을 다른 이들은 잘 모른다. 그런 그가 성동문화원의 학력인정 문자해득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해 초등학교 학력을 인정받았다. 중학교에도 진학했다. 홍씨는 이제 여전도회 서기도 맡기로 했다.

24일 오후 3시 서초구 교육연수원 우면관에서 열린 특별한 졸업식에 참석한 홍씨는 누구도 예측 못할 만큼 가슴 떨리고 행복해했다. 그와 함께 '2014년 초등·중학 학력인정 문자해득교육 프로그램' 이수자 498명이 배움의 열정 끝에 졸업장을 받았다. 서울시 내 초등학교와 지정교육기관에서 공부한 이번 졸업생들은 70대가 40.6%, 60대가 34.5%로, 50~80대의 장·노년층이 대부분이다. 서울교육청은 2011년 전국 시도교육청 가운데 처음으로 '초등학력 문자해득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해 지난해까지 졸업생 1299명을 배출했다.


'학력인정 문자해득교육 프로그램'이란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초학력 부족으로 가정과 사회에서 불편을 느끼는 이들을 대상으로 문자해득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마련된 교육프로그램이다. 만 18세 이상 성인 무학자 또는 비문해자를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다. 교육감이 설치·지정한 문자해득교육 프로그램 이수자에게는 평생교육법에 의해 초등학교 및 중학교 졸업학력이 주어진다. 현재 서울 인구 963만명 중 국가 의무교육에 해당하는 중학교 학력 미만 성인인구는 74만명으로 전체의 9.7%로 집계된다.

이날 조희연 교육감은 격려사를 통해 "젊은 시절에는 자녀를 양육하시고 생활 전선에서 바쁘게 활동하시느라 학업을 계속할 엄두를 못 내시다가, 지금도 늦지 않았다며 용기 내어 학교의 문을 두드린 만학도 여러분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드린다"며 "이러한 만학도 여러분의 열정이 현재 방황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도 전해져 공부할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고 말했다. 조 교육감은 이어 최고령자인 졸업생 대표 윤신애(86)씨에게 학습에 적극 참여하고 학업 성취가 높은 학습자에게 수여되는 교육감 표창장을 수여했다.

만학의 시인, 초등 졸업하시다 24일 서울 서초구 교육연수원 우면관에서 열린 '해오름 졸업식'에서 초등ㆍ중학 학력인정 문자해득 교육과정을 이수한 어르신들이 학사모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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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졸업식에서는 배움의 열정에는 나이가 따로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만학도들의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마포 성인문해교실에서 공부한 손정애(76)씨는 처음 문해교실을 찾았을 때 72세였다. 집 근처에 성인 문해교실이 없어 지하철로 오가야 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는 "한글을 처음 배우기 시작해 자음과 모음을 익히는 데 반년이 걸렸다"며 "배우고 잊으면 다시 공부하고 또 잊으면 다시 공부하기를 반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등교했다"고 말했다. 그는 집안일과 손자 돌보기 등으로 바쁜 일상생활 속에서도 일기를 꾸준히 써왔다. 처음에는 두세 줄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반 페이지가 넘는 글을 쓴다. 손씨는 "길가의 간판이라도 읽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에서 첫발을 디딘지 어언 4년, 이제 어엿한 초등학력을 인정받는 졸업생이 됐다"며 기뻐했다.


서남순(81)씨는 2011년 푸른어머니학교(푸른시민연대)에 처음 입학해 5년째 되는 올해 초등학력을 인정받게 됐다. 서씨는 "처음 아들이 학교에 다니라 권했을 때는 '다 늙었는데 무슨 공부냐'고 고집을 부렸다"며 "1년간 계속된 아들의 권유에 따라 처음 학교에 발을 디딘 그날부터 학교에 빠지지 않고 나가 개근상을 매해 빠짐없이 받았다"고 말했다. 늘 교실 맨 앞자리에 앉는 그는 정규수업 외에 특별반으로 개설된 시쓰기반과 인생쓰기반 등에도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열린 서울문화제 '청춘, 꽃을 피우다'의 시낭송회에서는 '가방'이라는 시<사진>를 낭송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글을 몰라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짓고 있던 가운데, 서씨의 시에는 특유의 발랄함과 밝은 성격이 한껏 발휘돼 시낭송회장이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됐다. 그는 "여든인 나도 하는데 나보다 젊은 이들은 더 잘할 수 있다"며 "죽을 때까지 배움의 기쁨을 놓지 않겠다"고 말했다.

만학의 시인, 초등 졸업하시다 서남순(81)씨의 시 '가방'


졸업생 홍양순씨는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배워서 문해 교사 자격증을 딸 것"이라며 "나처럼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봉사를 하는 것이 인생 마지막 꿈"이라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sayyunj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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