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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은 망했지만 사람은 건졌죠"…신간 '파산' 펴낸 이건범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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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매출 IT신화서 신불자까지…청년사업가에 띄우는 실패의 기록…30년 시민운동 "사람·연대가 중요"

[아시아경제 이윤주 기자] 파산으로 신용불량자가 된 1급 시각장애인. 서울대 출신으로 30대 초반에 IT업체를 창업해 연매출 100억원을 기록한 사업가. 한 50대 남자의 현재와 과거다. 그가 '파산'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좌절과 눈물로 얼룩진 중년 남자의 뒷모습이 담겼을까 싶지만, 부제가 중요하다. '그러나 신용은 은행이 평가하는 게 아니다.' 파산이지만, 파산만은 아닌 경험을 풀어낸 저자 이건범(50)씨를 만났다.


그는 이미 수권의 책을 펴낸 작가이고 현재 한글문화연대 대표를 맡고 있다. 교육부의 초등교과서 한자병기(倂記)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고, 곧 출간될 다음 책을 마무리하느라 집필활동을 쉴 틈이 없다. 그를 만난 지난 25일 성탄절 아침, 그는 자신의 SNS에 '평화로운 아침이 그저 차분하지만은 않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휴일의 여유를 즐기다 문득, 힘든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날이 더욱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고 했다. 공장 굴뚝 위에 올라가 있는 쌍용차 노동자들, 크리스마스이브에 케이크 조각을 바다에 던져주며 조촐한 성탄의식을 치러야 했던 팽목항의 세월호 가족들…. 민주화운동으로 옥살이까지 했던 20대부터 세월호 특별법 서명을 받으러 다녔던 올해까지 30여년간 사회참여를 그치지 않아 온 그에게는 '파산보다 아픈'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다.

이 대표는 책을 통해 '망해봤자 별거 아니더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시쳇말로 '쿨해' 보이려는 게 아니다. 그는 "인생은 일직선의 100m를 뛰는 게 아니더라"며 "산다는 것은 각자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모를 밀림을 헤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우거진 밀림을 헤쳐나가는 나가는 방법은 사람마다 모두 다른데,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위치를 일직선상에 놓고 남과 비교해 가늠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척박함이 이러한 하나의 가치 안에 사람들을 내몰기도 한다. 이 대표는 '어떤 것만 성공이고 다른 것은 성공이 아닌가?' 그리고 '성공과 실패를 꼭 나눠야 하나?' 이 두 가지 질문이 모두 가능한 사회를 바란다고 했다.


그가 30대 초반에 창업에 뛰어든 것 역시 오로지 한 가지 잣대로 경쟁만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그렇지 않은 기업도 잘될 수 있다는 것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1등은 어차피 1명뿐인데 꼭 모두가 1등을 해야 하나?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즐겁게 일하자'는 목표였다. 꿈은 현실이 되어 갔다. '즐거움'과 '효율성' 두 가지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회사가 순조롭게 운영됐다. 직원이 120명까지 늘어나고 이 대표는 정보통신부장관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승승장구하던 회사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그에게 '두려움', 혹은 '조바심'이 닥치면서부터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사회가 벤처 열풍에 휩싸였고 업계의 지형이 격변하는 게 느껴졌어요. 들어보지도 못했던 신생 벤처들이 급속도로 성장하는가 하면 느닷없이 '코스닥'이 등장했죠. 우리가 회사를 통해 그동안 지켜온 가치가 갑자기 '바보 같은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한 사회 전체가 '이것만이 길'이라고 입을 모아 얘기하니, 우리가 이대로 가도 과연 괜찮을까 하는 조바심이 생겼어요."

"사업은 망했지만 사람은 건졌죠"…신간 '파산' 펴낸 이건범대표 신간 '파산'의 저자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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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겠다 싶어, '사회의 대열'에 끼어들기를 택했다. 외부 투자를 받아 외형을 키우고, 신사업을 도모해 하루빨리 코스닥에 상장돼야 한다고 조직을 몰아세웠다. 그는 "결국 나를 남들과 견주기 시작하면서 회사의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라며 "처음 회사를 세울 때 지키고자 했던 가치, 그걸 지켜온 나 자신을 믿지 못했던 게 실수였다"고 회상했다. 오히려 그때 맘을 급하게 먹지 않고, 가던 길을 천천히 갔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경험을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두려움, 경쟁에서 낙오할지 모른다는 '배제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는 "세상이 요구하는 힘을 가지려 무리하게 애쓰는 순간, 내 안에 '원래' 있던 힘을 잊게 된다"며 "때로 공포가 찾아와도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업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심지어 파산했으면서도 그가 여전히 청년 사업가들을 응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는 곡절 많았던 자신의 인생을 통해 '사람' 그리고 '연대'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됐다고 강조한다. 이 대표는 "국제사회에서도 한 나라가 디폴트를 선언하면 다른 나라들이 힘을 모아 도와주지 않나. 그 나라를 살려내지 않으면 여파는 모두에게 돌아오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는 최소한 한 개인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책임은 모두가 함께 져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한 듯하다"고 말했다. 같은 과거를 공유한 사람들이 한 사회를 구성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우애'가 바탕이 돼야만 건강하게 유지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지향하는 바가 달라서 만나면 티격태격할지 몰라도, 어린 시절에 추억을 함께 나눈 친구들을 만났을 때 강한 결속감이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그는 설명했다.


인터뷰 도중 올 봄에 군대에 간 아들에게서 전화가 오자 '공중전화로 걸려온 것이라 받아야 할 것 같다'며 양해를 구한 그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로 아들의 목소리를 반겼다. 성탄절이라 '특별한' 간식이 나왔다고 자랑하는 아들과 군대에서 첫 겨울을 나고 있는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에게서 진한 신뢰와 우애가 느껴졌다. 휴대폰을 바로 코앞에 대야만 화면을 어렴풋이 볼 수 있는 시각장애인인 그는, 기자에게 아들의 사진을 찾아 보여주며 또 한 번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웃음을 지었다.


"책을 탈고하고 서문을 쓰는데 마지막 문장으로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쓰고 마침표를 딱 찍는 순간,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큰 울림이 있었어요. 아프고 괴로운 사람이 너무 많고 때로는 '지옥'에 비유되는 세상이지만, 자신만의 길을 가면서 발견하는 기쁨을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이윤주 기자 sayyunj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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