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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보고서 55]생존 할머니 증언<16> 최갑순·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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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보고서 55]생존 할머니 증언<16> 최갑순·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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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 김보경 기자, 김민영 기자, 주상돈 기자] #46. 최갑순 '14살때부터 해방될 때까지 12년간 고초'


최갑순 할머니는 1919년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나 14살 때 중국 둥안성(東安省)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가 해방이 될 때까지 12여년간 고초를 겪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장사를 시작했다. 최 할머니는 구례에서 농사를 짓고 양아들을 키우며 생계를 이어갔다. 마흔이 넘어 결혼을 한 후 뒤늦게 서울에 살림을 차렸다. 20여년 전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떴다.

할머니는 서울의 한 노인전문병원에 입원한 지 3년이 넘었다. 2012년 초 양아들마저 운명을 달리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는 아들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었다. 이제는 눈과 귀도 나빠지고, 말할 기운마저 성치 않은 상태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이전보다 살이 너무 빠진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하고 있다.


[위안부 보고서 55]생존 할머니 증언<16> 최갑순·최○○·최○○

#47. 최○○ '아이 낳지 못해 입양한 양딸에 의지해 살아'

1925년생인 최○○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를 겪은 후 아이를 낳지 못해 양딸을 입양해 키웠다. 2003년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최 할머니는 "남부끄러워 죽을 때까지 얘기하지 않으려 했는데…"라며 정대협에 증언을 했다고 한다.


최 할머니는 수원의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살다가 10년 전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경기 용인의 한 병원에서 일반병실과 중환자실을 오가며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노래를 잘해 동요 '나비야'를 즐겨 불렀던 할머니는 이제 목에 가래가 껴 전처럼 예쁜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치매 탓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면회를 오면 연신 "예쁘다, 예쁘다"고 말하는 최 할머니다. 다행히 딸이 곁에서 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다.


[위안부 보고서 55]생존 할머니 증언<16> 최갑순·최○○·최○○

#48. 최○○ '일본 정부의 태도에 그저 먼 곳만 바라봐'


1922년생인 최○○ 할머니는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지낸다. 할머니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소고기를 꼽는다. 하지만 이가 많이 빠져 잘 씹지를 못해 소화기능이 약해지고 말았다. 이런 할머니를 위해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틀니를 하자고 권유해도 "얼마 안 있으면 죽을 텐데 뭘 하느냐"고 사양한다고. 위안부 운동 상황과 일본 정부의 태도에 대해 설명하니 그저 짧게 대답하면서 먼 곳만 바라봤다고 한다.


할머니는 무릎도 좋지 않고 손을 많이 떤다. 가족이 있지만 자주 찾아오기 힘들어 할머니는 요양병원 생활이 늘 외로운 듯하다. 활동가들과 작별인사를 하면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고. 활동가들은 한목소리로 "할머니는 손도 곱고, 피부도 하얘 웃는 모습이 소녀처럼 참 보기 좋다"고 말한다.


※생존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은 시리즈 중 계속됩니다.


▶'위안부 보고서 55' 온라인 스토리뷰 보러가기: http://story.asiae.co.kr/comfortwomen/




김동선 기자 matthew@asiae.co.kr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주상돈 기자 do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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