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시리즈 Story #8. 금배지 운전기사
정치 후원금 관리·매일매일 일정·애완견 사료까지 챙겨…
"부친 제사에도 못갑니다"
[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 김민영 기자, 김보경 기자, 주상돈 기자] 지근거리에서 국회의원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지켜보는 사람. 바로 국회의원 운전기사다. 국회에서 의원 운전기사는 수행비서로 통한다. 수행비서는 국회의원 보좌진의 한 직렬로 별정직 공무원 신분이다. 대개 7급이지만 의원실에 따라 4~9급까지 다양하다. 다양한 직급만큼 하는 업무도 일반 기업의 운전기사와는 달리 가지각색이다.
지난해 6월 국회에 들어오기 전까지 3년 동안 한 중소기업의 사장을 모셨다는 K씨는 "의원 수행비서는 운전만 하는 게 아니라 후원금을 관리하기도 하고 일정관리 등 정무 업무를 함께 담당하기도 한다"고 했다. 수행비서가 해야 하는 업무가 무 자르듯 구분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운전을 하는 수행비서는 매달 '운전 겸임 수당' 3만원을 받는데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이 수당을 받는 사람은 현재 270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과연 어떻게 해서 국회에 '입성'했을까. 공식적으로 이들은 공채를 통해 국회에 들어온다. 그러나 알음알음 소개로 운전대를 잡는 경우도 있고 친동생이나 친척에게 운전을 맡기는 의원도 있다.
A(31)씨는 20대 중반이던 6년 전 선거운동을 돕다가 아예 수행비서로 눌러 앉았다. 국회를 떠나면 모은 돈으로 장사라도 할 계획이라는 그는 젊다 보니 자기 시간이 없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고 했다. A씨는 "젊은 사람은 잘 못 버텨요. 돈 쓸 데도, 쓸 시간도 없으니 돈은 잘 모이죠. 결혼 자금을 착실히 모으고 있는데 정작 연애할 시간이 없네요"라고 말했다.
◆사시준비生·석사 두개 딴 사람·기자출신 등 경력 짱짱=운전기사라고 낮잡아 보기엔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자랑하는 사람도 많다. 현재 국회엔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그만두고 국회에 들어와 운전을 시작한 사람부터 석사학위를 두 개나 취득한 운전기사도 있다. 기자 출신도, 전직 음반기획자도 수행비서로 일하고 있다.
비록 별정직이긴 하지만 국가공무원이라는 점은 국회의원 운전기사라는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개인회사에 있다가 공무원 신분으로 바뀌자 K씨 부모님은 '장가 들기 번듯한 직업이 됐다'며 좋아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안심할 처지는 못 된다. 임명권과 면직권이 의원에게 있어서 의원의 한마디에 일자리를 잃을 수 있는 '파리 목숨'이라는 게 바로 수행비서의 숙명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입조심이다.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이라는 K씨는 오히려 그 점이 수행비서로 낙점된 까닭이라고 수석보좌관으로부터 전해들었다고 했다. 또 다른 의원의 운전기사는 "수행비서가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입이다. 시집살이랑 똑같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처럼 지내야 한다"며 "특히 전속 수행비서의 경우 의원의 사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조심해서 '간택'한다"고 설명했다.
◆밤낮없이 운전, 3년간 30만㎞ 뛰는 '천리마'=수행비서는 출퇴근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의원의 일정에 맞춰 움직이다 보니 캄캄한 새벽에 나가 별 보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 부지기수다. 특히 지역구가 서울, 경기 등 수도권이면 하루도 쉴 수 없다고 한다. 지역구가 가까울수록 의원의 발길이 잦기 때문이다. 예컨대 구로 같은 경우 여의도 국회에서 30분이면 닿는 거리다. 강원도가 지역구인 국회의원의 수행비서들도 힘든 축에 속한다고 한다. KTX 등 대중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아 직접 모셔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강원도가 지역구인 의원의 한 수행비서는 "하루 14시간 운전한 적도 있는데 도착해서 저녁 먹고 2시간만 달랑 있다 돌아온 적이 있다. 원주쯤 왔을 땐 거의 눈을 감고 운전한 것 같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히려 거제도 등 지역구가 먼 경우 부산까지 비행기를 타고 내려가면 현지에서 다른 지역 보좌관이 운전하기 때문에 더 낫다고 귀띔한다. 7년차인 한 수행비서는 3년3개월 동안 차 운행기록을 따져보니 30만㎞를 뛰었다고 했다. 약 3년간 지구 7바퀴 반을 돈 셈이다.
가끔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무서울 때도 있단다. 한 수행비서는 "지난 대선 때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보좌관이 교통사고로 숨진 사고가 났을 때 뒤따라가던 차량을 몰고 있었다"면서 "그 사고가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운전대를 잡던 손이 덜덜 떨렸다"고 했다. 사고현장도 많이 목격하는데 그럴 때마다 '금 하나 잘못 밟으면 의원도 나도 황천길'이라는 생각에 바싹 긴장하게 된다고 했다.
모시는 의원의 성향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이들이 겪는 고충도 각양각색이다. 예컨대 꼭 정문만 고집하는 의원들은 후문 등 다른 문으로 들어갈라치면 '내가 개냐, 왜 개구멍으로 들어가느냐'며 신경질을 낸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정문으로 돌아가느라 회의에 늦으면 그것도 수행비서 탓이 된다고.
여성 국회의원을 수행하는 비서들 중엔 이른 아침에 미용실 등에서 한두 시간 대기하거나 애완견 사료를 챙겨줘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18대 국회 때부터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한 수행비서는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힘들다 등 불만이 폭발하다가도 의원 칭찬 한마디에 불평이 쏙 들어간다"고 했다. 한 고참 수행비서는 후배들에게 생각을 많이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권태기가 오는 횟수가 잦아지고 최악의 경우 우울증까지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말 없이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어떤 의원실은 한 달에 한 번 휴가를 주기도 한다. 대개 수행비서는 국회의원이 해외출장 등 자리를 비울 때나 비로소 휴가를 맛볼 수 있다. 올해 6년차인 수행비서 김모씨는 5년째 아버지 제사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고 했다. 처남 결혼식에도 가지 못해 처가 쪽 식구들과 얼굴을 붉혔다고 하니 개인시간 내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소연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휴게실도 정당별로 따로=휴식 시간은 따로 없다. 대개 의원들이 회의 등 공무를 볼 때 주변에서 대기하며 틈틈이 휴식을 취한다. 차 시동을 켜놓고 쪽잠을 취하는 수행비서도 있지만 대개 차 안은 텅 비어 있다. 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의원회관에는 의원 운전기사들이 쉬는 휴게실이 7개 있다. 의원회관 지하 2층에 2개(각 52㎡), 지하 1층에 3개(77㎡·54㎡·38㎡), 1층에 2개(85㎡·65㎡) 등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소속 정당에 따라 휴게실을 따로 쓴다는 점이다. 구관에는 새누리당, 신관에는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운전기사의 휴게실이 있다. 각 휴게실 입구엔 '관계자 외 출입금지' '수행비서 휴게실'이라고만 붙어 있어 이곳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은 구분이 쉽지 않다.
지하 1층에서 만난 한 운전기사는 "양당 기사들끼리 따로 모이는데 두 당 분위기가 교묘하게 다르다"며 "삼성 태평로 지하주차장이랑 현대 계동 지하주차장에만 가봐도 조직 문화가 다르지 않느냐"고 했다.
A당 수행비서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의자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중년 남성이 성큼 걸어온다. "무슨 일 때문에 오셨어요?" 경계하는 눈치다. 양복을 빼입고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겼다. 한 손에는 추리소설이 들려 있다. 잠깐 쉬는 중이라며 말을 아낀다. 평소 그렇게 차려 입느냐고 묻자 "의원님 그림자인데 청바지는 절대 입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시간차를 두고 찾아간 B당 수행비서 휴게실. 마침 휴게실에서 나오는 수행비서에게 '들어가봐도 되느냐'고 묻자 손사래를 친다. 금녀의 방이라 속옷만 입고 자고 있는 사람도 여럿이란다. 그러나 안을 훔쳐보니 4~5명이 둘러앉아 포커게임에 열중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휴게실엔 샤워실도 딸려 있어 귀가시간이 들쑥날쑥한 수행비서들에게 인기다.
막내 수행비서들은 휴게실을 잘 찾지 않는데 대개 의원실에서 명함 정리 등 개인 업무를 본다고 한다. 2년차인 한 수행비서는 "휴게실에 가봤자 막내라고 청소나 심부름을 하고 고참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고 털어놨다.
수행비서들의 애환을 묻는 말에 주차장에 빙 둘러서 담배를 태우던 이들이 뻔한 걸 물어보느냐며 면박을 준다. 그들 중 한 명이 말을 덧붙인다. "임면권을 의원이 쥐고 있는 한 우리는 을이야. 개선될 여지? 그러려면 임면권을 정부에 줘야지."
생일 명단 적힌 수첩·목캔디·화장품 파우치 등 움직이는 사무실
요즘 의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차는 카니발
국회의원 차량은 '움직이는 사무실'이다. 하루에 여러 개의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의원들은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보좌진들은 국회의원이 이동 중에도 편히 용무를 볼 수 있도록 차 안에 갖가지 물품을 구비해 놓는다.
슬쩍 들여다본 남성의원의 차량 안 콘솔박스에는 목캔디, 비타민, 물티슈, 500㎖ 생수 한 병 등이 놓여 있었다. 조수석에는 수첩, 볼펜, 담뱃갑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여성의원의 차량 안은 또 다르다. 이들을 모시는 수행비서들에 따르면 여성의원들은 별도의 화장품 파우치를 놓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이 외에 '기름종이'도 필수품이다. 뒷좌석에 여벌로 옷을 걸어두는 여성의원도 있다.
이 공간에서 의원들은 쪽잠을 자거나 용건을 해결한다. 자투리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지역구 관리를 하는 의원도 있다. 지방에 지역구를 둔 P의원을 보좌하는 김모 보좌관. P의원을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수행비서 대신 운전대를 잡았을 때다. 차를 출발시키자마자 뒤에서 P의원의 말소리가 들렸다.
혼잣말을 하는 줄 알고 룸미러로 힐끔 보니 "국회의원 ○○○입니다. 오늘 생일이시죠? 미역국은 드셨나요?"라며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P의원은 평소 3만명의 지역구 사람들을 명단으로 만들어 관리하는데 이 명단에는 이름, 직업, 고향, 전화번호, 가입 단체 등의 정보들이 낱낱이 적혀 있다고 한다. 보좌관이 이 명단 중 생일인 사람을 추려 건네면 P의원이 생일축하 전화를 거는 것이다. P의원은 이 작업을 4년 내내 했다고 한다. 인구가 적은 지역구의 경우 선거 때 몇 만표, 적게는 몇 천, 몇 백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기도 하니 유권자들을 내편으로 끌어오기 위한 작업을 평소 꾸준히 하는 것이다.
온갖 잡무를 해결하는 공간인 만큼 의원들은 대형차를 선호한다. 실제 이달 16일 기준으로 국회사무처에 등록된 '19대 국회의원 차량 등록 현황'을 보면 총 284대 중 의원들의 선택을 가장 많이 받은 차량은 카니발(79대)이었다. 에쿠스(53대), 제네시스(43대), 그랜저(35), K9(17)이 그 뒤를 이었다. 또 국회사무처는 국회사무처법에 근거해 차량 운영비를 별도로 지급하는데 의원실마다 월 145만8000원을 지원한다.
지금은 국회의원 개인이 차량 구매 비용을 부담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민의원들에게 지프차가 무상으로 제공되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 치안이 불안했던 탓에 지프차가 필수였다는 것이다. 당시 수행비서들은 권총을 차고 다녔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차량계에서 30년 동안 근무했다는 직원은 "이에 대해 금시초문"이라며 "1980년대 초부터 국회에서 근무했지만 차량을 무상으로 제공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목적지가 초행인 경우가 많아 의원 차량에 내비게이션은 필수다. 보통 수행비서들은 차량에 탑재된 내비게이션 외에 휴대전화의 내비게이션 기능을 함께 켜둔다. 가장 빠른 경로를 찾기 위해서다. 한 수행비서는 "운전할 때 기본적으로 내비게이션 3개를 켜둔다. 그중 하나는 바로 뒤에 앉아있는 의원님"이라고 말했다. 뒤에 탄 국회의원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며 인간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것을 빗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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