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전세종]
세월 참 빠르다. 보리가 벌써 누렇게 영글고 있다. 잔설(殘雪) 언저리에서 파릇파릇 예쁜 짓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옛적 할머니 말처럼 이제 ‘돈 살’ 일만 남았다.
요즘은 식이섬유네 항산화물질이네 해서 건강식으로 꼽히지만 오래 전 보리는 가을이 오기까지 백성들을 굶어죽지 않게 하는 소중한 곡식이었다. 보릿고개에 아랑곳없는 철부지 시절, 보리 목을 쪽 빼내 피리를 불고 불 피워 그을려 비벼 먹던 추억이 엊그제 같은데…. 서로의 입가에 묻은 검댕이를 가리키며 깔깔거리던 철부지들도 이제 보리의 황금빛으로 늙었다.
보리밭 추억이 그립다면 전남 보성의 예당평야에 들러보라. 득량만 바닷바람에 황금물결 치는 보리밭을 거닐면 박화목의 시 ‘보리밭’에서처럼 ‘뉘 부르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영농조합의 전화번호를 따오는 것도 좋겠다. 곧 수확하면 두어 말 전화로 주문할 수 있도록. 아닌 게 아니라 이곳의 지명 득량(得粮)면은 이순신 장군이 전란을 치를 때 식량을 조달했다는 기록에서 인용된 것이기도 하다.
해풍이 키운 예당평야의 보리는 풍부한 영양물질 말고도 특별한 것들을 가득 담고 있다. 모진 겨울 갯바람을 이겨낸 보리의 생명력, 착실한 농부의 꿋꿋한 의지, 그리고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부모의 고단한 삶에 관한 기억까지도….
사진 제공 = 보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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