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司馬遷)은 싼시성 한성현 출신으로 자는 자장이며 한무제 때의 사관이다. 생몰(生沒) 연도에 관해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대략 기원전 2세기 사람으로 정사인 24史 중 가장 오래된 사기(史記)의 저자다.
그는 사관 집안 출신으로 10세 때 고전을 암송하고 20세에 천하를 주유하여 역사와 사회를 보는 안목을 키웠다. BC 108년에는 아버지 사마담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순탄한 사관의 길을 밟던 그의 삶은 BC 99년 이릉 사건에 휩싸이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릉은 명장 이광의 손자로 이사장군 이광리를 수행하여 흉노정벌에 나갔다가 적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한무제 앞에서 이릉을 변호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생식기를 거세당하는 궁형에 처해진다.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버지의 유언을 완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사마담은 임종 시 "내가 태사령의 직위에 있으면서도 천하의 역사를 폐기하고 말았다. 내가 죽으면 너는 태사령의 직책을 잇게 될텐데 아버지의 뜻을 잊지 말아라"는 유언을 남겼다. 결국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궁형의 치욕을 감수하였다.
그는 궁형 이후 오로지 역사를 쓰는 일에 삶의 의미를 두었다. 사기야말로 발분지서(發憤之書)다. 북송의 재상 구양수는 사기를 "세상에서 뜻을 잃은 자가 마음에 맺힌 것을 깊이 생각하여, 감격 발분하는 것을 오로지 문장에 나타낸 사서"로 평하였다. 그는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말로 만일 이 역사서를 완성하여… 영원히 전하고… 유포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때야말로 내가 받았던 치욕을 보상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내 몸이 여덟로 찢긴다 하여도 결코 후회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초고를 다 쓰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했는데, 나의 작업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안타까이 여긴 까닭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선비의 굴욕을 불후의 사서로 승화시킨 위대한 역사가의 울분에 찬 절규다.
사기는 완성하는데 20여년이 소요된 역작으로 송사, 금사, 요사, 원사가 1~3년 만에 졸속으로 만들어진 것과는 크게 대조된다. 사기는 24사 중 군계일학으로 한서, 자치통감 등 다른 사서와 달리 애증의 감정 서술이 풍부하다. 특히 문체가 뛰어났고 53만 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무엇보다도 일종의 민중사로 그 시대의 풍속, 지리에 관한 상세한 묘사로 매우 생동감이 넘친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산 시대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역사관이다.
사기는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인간의 행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서술되었다. 그런 점에서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마르크스나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헤겔의 역사철학과는 차이가 있다. 사기는 아웃사이더인 사마천의 자유의지 철학이 적나라하게 표출된 사서로서 상투적인 틀을 과감히 파괴한 책이다. 스스로 쓰고 싶어서 쓴 역사서다. "사람은 언젠가 한 번 죽습니다.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도 있고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도 있습니다"라는 사마천 고유의 역사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당나라 학자 유지기는 사관은 사재(史才), 사학(史學), 사식(史識) 세 가지 재주가 필요한데 그 중 사식, 즉 역사인식이 가장 중요하다 했다.
후대의 관학은 사마천의 자유분방한 역사서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한서의 저자인 반고는 대표적인 비판가의 한 명이다. 그는 "사기의 역사판단은 성인의 그것과 아주 다르다. 도를 논함에 있어서는 노자사상을 우선시했다. 유협의 열전을 쓴 반면, 은사를 배격하고 간웅을 칭송하였다. 화식 열전을 기술함에서는 이익을 존중하고 가난을 치욕으로 여겼다. 이것이 사기의 폐해다"라고 비판하였다. 자치통감강목의 주희도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해 사마천의 현실주의적 역사관을 깎아내렸다. 마오쩌둥은 사기를 즐겨 읽었고 등장인물의 혁명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누가 뭐래도 사기는 중국 24 정사의 으뜸이다.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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