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으로 태어나 자랐지만 결혼하면서 을(乙)이 됐고, 아이가 태어나자 병(丙)으로 내쳐지더니, 급기야 강아지한테 밀려 정(丁)으로 추락했다는, A 그룹 임원의 '웃픈(웃기지만 슬픈)' 이야기가 어디 그만의 사연일까. 직장에서는 '별'을 달았지만 가정에서는 '팽'을 당하는 가장들은 주변에 숱하다. 집 밖에서의 맹수가 집 안에 들어서면 초식동물로 변한다. 그러니 개한테 밀릴 수밖에. 이게 끝이 아니다. 저 개가 새끼라도 낳으면?
몸이 아파 병원을 찾는 환자에게는 의사가 갑이다. 이 의사의 자녀가 학교에서 사고를 쳤다면 의사는 졸지에 을이 되고 교사가 갑이다. 이 교사가 근무하는 학교가 비리를 저질렀다면 교사는 을이고 검사가 갑이다. 반전은 또 있다. 앞서 병원을 찾는 환자가 검사라면? 교사, 의사, 검사가 뒤엉킨 '갑과을의 뫼비우스 띠'다.
사실은 우리 삶이 갑과을의 드라마다. 조직에서는 선배가 갑이고, 경기장에서는 심판이 갑이고, 선거 전에는 국민이 갑이고, 선거 후에는 정치인이 갑이고, 아파트에서는 윗집이 갑이고, 술자리에서는 폭탄주가 갑이고, 무도장에서는 스피커와 조명이 갑이고, 라면에는 찬밥이 갑이고.
어제 만난 조윤선 여성가족부장관은 자신을 '을'에 빗댔다. 여성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기업에 아쉬운 소리를 한다면서. 조 장관이 머리를 조아리는 기업에도 갑은 넘쳐난다. 세금 폭탄을 때리는 국세청, 거래를 감시하는 공정거래위원회, 그리고 힘쎈 노조까지.
믿거나 말거나지만, 펜실베니아 대학의 키와 연봉의 상관관계 연구(2001년)에 따르면 사람의 키에도 갑을이 존재한다. 연구팀은 어릴 때 키가 작았던 사람은 사교활동에 활발히 참여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고 자부심도 약하며, 그 결과 키 1인치(2.54cm)마다 789달러의 연봉 차이가 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요즘 아이들의 성장 추세라면 갑은 175cm, 아니면 180cm 이상?
갑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라는 10천간(天干)에서 유래했다. 여기에 '자축인묘...'로 시작하는 12지지(地支) 를 조합해 우주의 기운을 따지는 60갑자(甲子)가 탄생했다. 대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나타내는 갑을이 본래 뜻과 무관하게 강자와 약자의 서열 관계를 대변하고 있으니 요지경 세상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누군가의 갑은 누군가의 을이라는 인생의 진리다. 그러니 갑이라고 깐죽댈 것도, 을이라고 좌절할 것도 없다. 다만, 저 개가 새끼를 낳지 않기만 바랄 뿐.<후소(後笑)>
이정일 산업2부장 jay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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