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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읽다]친절한 '방통심의위' 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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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정종오 기자]1990년대 중반으로 기억한다. 당시 국내에는 성인 비디오가 인기였다. 비디오방은 물론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가장 잘 나가는 비디오 중 하나가 '성인 비디오'였다. '빌보드차트'처럼 성인물만의 랭킹 순위가 집계되기도 했다.


한때 불티나게 빌려가고 비디오방에서 특정 성인 비디오가 화제가 되는 상활까지 치달았다.

국내 성인 비디오물을 제작하는 특정업체가 돈을 긁어모은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들의 마케팅이 교묘했다. 성인 비디오물 제작업체들은 홍보를 위해 자신들이 제작한 VHS테이프를 직접 들고 각 언론사를 찾았다. 스포츠신문이 집중 타깃이었다. 이들은 비디오테이프를 담당 기자들에게 내려놓으면서 "쎄게 조져(?)주십시오(엄청 비판적으로 써주십시오)"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다음날, 신문지면에는 특정 성인 비디오물을 언급하는 기사가 앞 다퉈 실리는데 "어떻게 이런 장면까지 나올 수 있나? 경악" "노출 정도, 상식 넘어서~" "파격 장면 충격~" 등의 문구가 동원됐다.

그 이후 어떻게 됐을까. 동네 비디오가게는 물론이고 도심 곳곳에 터를 잡고 있던 비디오방에서는 해당 기사에 언급된 비디오물은 동이 나 버렸다는 후문이다.


[방송을 읽다]친절한 '방통심의위' 氏 ▲방송통신심의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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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 이야기가 생각난 것은 15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위원장 박만)가 보내온 하나의 보도자료 때문이다. 방통심의위는 '불륜 조장 OOO OOO 사이트 접속차단 결정'이란 자료를 내놓았다. 물론 'OOO OOO'에는 특정업체의 실명이 언급돼 있었다.


이 자료를 보면 너무 친절한(?) 듯 해 불편함을 느꼈다. 보도 자료에는 이번에 접속 차단된 특정업체의 실명을 강조하듯이 여러 번 언급됐다. 이 뿐만이 아니다. 보도 자료에 표현된 문구가 지나치게(?) 선정적이다.


보도 자료에 나온 문장들 중에 '불륜 조장' '인생은 짧아요, 바람피세요' '기혼남녀의 은밀한 만남', '매일 수천 명의 바람피는 아내와 남편들이 가입하여 애인을 찾습니다' 등의 문구가 그대로 적혀 있다.


'친절한 방통심의위 氏'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해당 업체의 회원 가입규모와 가입 절차까지 알 수 있도록 했다. 보도 자료에서 방통심의위는 '수만 명의 국내 이용자를 모집해'라고 설명했다. 이어 "기혼남녀를 대상으로 혼외 성관계를 중개할 목적으로 회원가입 시 개인의 성적 취향, 성관계 의사 등을 표시토록 하여 회원 간 만남을 중개하고 다수 회원의 자기소개를 통해 성관계를 포함한 만남을 원하는 내용 등을 게재해…"를 적어 구체적 방법까지 제시해 놓았다.


굳이 해당사이트에 대한 실명을 언급할 필요성이 있었을까 싶다. 물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측면에서는 있을 수도 있다. 또 해당 사이트가 만든 광고 카피를 그대로 인용해 선정적 문구로 보도 자료를 만든 것도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해당사이트에 대해 접속차단 조치를 했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이트가 이뤄져 있는지,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 필요는 없었다. 특정업체를 홍보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방통심의위가 내놓은 보도 자료는 거의 모든 언론매체에 실렸다. 아마도 접속차단 된 해당업체는 우리나라에서 접속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톡톡한 홍보효과는 돈 들이지 않고 얻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청소년과 국민들에게까지 '아! 그런 사이트가 있었어?'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번 자료에서 중요한 것은 "최근 불륜을 조장하는 특정 사이트에 대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15일 접속차단 조치했다"에 있다. 특정 사이트의 실명도, 구체적 광고문구도, 회원 규모와 가입할 때의 구체적 방법도 알 필요가 없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나치게 '친절한 방통심의위'가 되고 말았다.




정종오 기자 ikoki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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