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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4장 흐르는 강물처럼(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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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4장 흐르는 강물처럼(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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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자에게 원고를 넘기고 나온 하림은 혜경이를 만나러 갈 계획이었다. 생각 같았으면 혜경이부터 찾아보는 것이 순서였다. 옛날 같았으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을 미적거리며 그녀와의 만남을 남겨두고 있었다. 쉬운 일부터 처리하고 나서 만날 셈으로 그런 것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두려운 마음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엇이 두려웠던 것인가?


자기가 생각해도 한심했다. 한때는 죽네 사네 하루가 멀다 않고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하림은 왠지 그녀 앞에 불쑥 나타나기가 못내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마 아직 스스로 자기 마음이 정리되지 못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미 미장원을 정리하고 멀리 아프리카로 떠나가기로 작정한 그녀에게 신파조로 징징거리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데면데면하게 굴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무슨 엉뚱한 용기를 발휘하여 같이 가겠다고 나설 처지도 아니었고, 언제까지나 기다릴테니 힘들면 돌아오라고 젠 체 되는대로 약속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서울로 돌아오면 당장에 그녀와 감격적인 해후를 하리라 다짐했던 바와는 달리 하림은 일주일을 훌쩍 넘기고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그냥 미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하면 한심한 노릇이었다. 그런 한심함은 어쩌면 하림 자신의 우유부단한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장차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었다.


이미 한물 간 논술학원을 여는 것도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고, 그렇게 시작한들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혜경이 말마따나 초라하게 나이가 들어 늙어가는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모른다가 아니라 뻔할 뻔짜였다. 언젠가 혜경이 말했었다.


‘여긴 새장 같이 답답해. 이대로 주저앉아 미장원에서 여자들 머리나 볶아주면서 나이 들어가는 게 어쩐지 슬퍼. 아니, 이런 대한민국이 싫어졌어.’ 그리곤 또,


‘내 것이 아닌 세상의 물결에 휩쓸린 채 모래시계처럼 빠져나가는 나의 생이 두려워. 세상은 나를 이미 자기에 맞게 튜닝을 했고, 난 그 속에서 꼭두각시가 되어 살고 있는 느낌이야.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이라면, 이렇게 늙어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하고 말했었다.


생각하면 논술학원을 한들 무엇이 다르겠는가. 도망간 늙은 원장처럼 자기 역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더 현명한 지도 모른다. 낯선 데 가면 개고생이야 하겠지만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그냥 주어진 대로 곱게, 곱게 노예처럼 받아들이며 살기엔 너무 억울한 생각이 자기라고 들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하지만.....


하림은 생각했다. 떠난들 무엇이 또 달라질 것인가. 그곳이라 하여 누가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고, 곧 싫증을 느끼고 만다면 그 다음은 어디로 갈 것인가. 돈이라도 많아서 펑펑 내지르다가 안 되면 돌아오면 그 뿐이라면 모를까, 몽땅 정리해도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다 써버리고 나면 그 다음은 대책이 없었다. 무엇보다 시간은 절대로 기다려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어정거리다 보면 곧 마흔 줄로 접어들 것이었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복잡해진 하림은 혜경이 대신 먼저 그날 살구골에서 헤어졌던 소연이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사촌언니를 따라 서울 병원으로 와있다는 그녀 소식도 궁금했거니와 무엇보다 그녀를 만나면 복잡해진 머리가 좀 정리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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