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 DNA <16> 악기장 윤종국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비닐 한 장 몸에 대고 황소 가죽을 추운 겨울날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는 길은 늘 험난했죠. 살점 벗겨진 가죽은 흉칙했고 냄새도 고약했어요. 기차를 타고 또 버스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선 사람들이 혐오스럽게 나를 쳐다봤어요. 거기다 가죽이 얼기라도 하면 아버지는 사정없이 화를 내시고 무지막지하게 때렸지요."
30여년 동안 북을 만들고 있는 윤종국(사진·53)씨는 아버지로부터 북 공예를 배우던 시절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난 1991년 5월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보유자 인정받고 평생을 북에 바친 고(故) 윤덕진 선생이 바로 그의 아버지다. 4남3녀 중 장남으로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난 윤종국씨는 아버지의 북 공예를 잇고 있다.
윤 씨는 "아버지는 오로지 북밖엔 모르는 사람이었요. 가난해서 어머니가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죠. 제가 북을 만들게 될지 몰랐는데, 제대 후에 저보고 북을 만들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좋은 회사를 다니던 동생들도 북을 같이 만들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아버지는 한명이면 족하다고 단호하게 막으셨지만 결국은 지금 같이 일을 하고 있어요." 신기한 일이었다. 전공도 다르고 다른 일을 하면서도 윤덕진 선생의 아들들은 이렇게 북을 만들겠다고 달려들었다. 지금 둘째는 북에 그리는 단청을, 셋째는 전통 북 유통업을, 넷째는 북 몸통을 짜는 일을 한다.
윤씨에게 아버지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늘 무서운 분이었지만 또 자신의 지금을 있게 한 스승이다. "돌아가셨지만 옛날 일을 생각하면 미운 감정이 들다가도 아버지께서 북 만드는 일을 가르쳐 준 게 생각나면 그리운 마음에 눈물이 앞을 가려요."
장남인 윤씨는 북 만드는 기술 중 가장 중요한 '가죽'을 다루는 것뿐 아니라 동생들의 일도 모두 진두지휘하는 대장 역할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3년에 1번씩은 꼭 북 장인으로서의 송산 윤덕진 선생 추모제를 여는 것도 그의 몫이다. 내년 6월에 또 개최되는 추모제에도 북 장인들과 북을 치는 연희자들이 한데 모여 성대한 공연과 전시를 펼칠 계획이다.
윤씨는 요즘 가업인 북공예를 4대로 넘겨야 한다는 책무에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이 제일 걱정이라 아들이나 조카들이 적극 나서지 않으면 선뜻 제안하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 '북 박물관'을 지어볼 계획이다. "그곳에서 북공예 수업과 전시를 열고 판을 한번 제대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고부터 대북까지 수십여종의 전통북은 크기마다 소리도 다 다르다. 그리고 가죽의 두께도 크기에 비례해 달라진다.
윤씨는 "가죽 공부가 끝이 없다"고 했다.
"우리 집안은 북을 만들 때 황소가죽만 써요. 옛날 밭 갈던 근육질 황소는 팽팽하고 웅장한 소리를 내기에 딱이죠. 그런데 이 가죽이란게 무두질하는 게 장난이 아니에요. 큰 북을 만들려면 소 반 마리 크기 가죽을 무두질해야 하는데 허리가 고장나기 일쑤죠. 최상의 소리는 무두질을 얼마나 잘했느냐에 달렸는데, 여전히 그걸 경험하진 못했어요. 죽기 전엔 되겠죠."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