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브릿지게임 용어에서 유래, 남녀골프 통틀어 보비 존스가 유일
[아시아경제 김현준 골프전문기자] '그랜드슬램(Grand Slam)'.
원래는 카드놀이인 브리지게임에서 패 13장 전부를 따는 '압승'을 뜻하는 용어다. 지금은 테니스와 골프, 야구 등에서 사용한다. 테니스에서는 국제테니스연맹(ITF)이 주관하는 윔블던과 US오픈, 프랑스오픈, 호주오픈 등에서, 골프 역시 마스터스와 US오픈, 디오픈, PGA챔피언십 등 4대 메이저를 한해에 모두 석권해야 하는 엄청난 일이다. 야구는 상대적으로 쉽다. 만루홈런이다.
테니스에서는 돈 벗지(미국)가 1938년 처음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이래 로드 레이버(호주)가 1962년과 1969년 두 차례나 기록했다. 여자테니스의 경우 모린 코널리(미국ㆍ1953년)와 마가렛 코트(호주ㆍ1970년),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미국ㆍ1983~1984년), 슈테피 그라프(독일ㆍ1988년) 등이 '그랜드슬래머'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여자테니스는 그러나 1970년 이후 의미가 퇴색했다. 호주오픈의 개최 시기가 조금씩 변하다가 1977년에는 1월과 12월에 두 번이나 열려 "첫 대회냐, 마지막 대회냐"에 대한 논쟁의 씨앗이 됐다. ITF는 결국 2년에 걸쳐도 메이저 4연승을 달성하면 그랜드슬램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한해냐 아니냐에 따라 '캘린더 그랜드슬램(Calendar Grand Slam)'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최근 일부 언론이 골프에서도 표기하는 '캘린더 그랜드슬램(Calendar Grand Slam)'이라는 표현이 생뚱맞은 이유다. 골프의 그랜드슬램에는 이미 '1년, 또는 한 시즌'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랜드슬램을 포장하기 위한 무리한 시도가 오히려 그랜드슬램을 격하시키고 있는 셈이다. 워낙 어렵다보니 연도와 상관없이 4대 메이저에서 각각 1회 이상 우승을 수확하면 '커리어 그랜드슬램(Career Grand Slam)'이라며 높이 평가한다.
골프의 그랜드슬램은 그야말로 새 역사 창조나 다름없다. 지금까지 1930년 '구성(球聖)' 보비 존스(미국)가 남녀골프를 통틀어 유일하다. 존스의 그랜드슬램은 물론 지금의 4대 메이저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존스가 마스터스를 창설한 해가 1934년, 그 이전인 당시에는 2개의 프로대회(US오픈, 디오픈)와 2개의 아마추어대회(US아마추어, 브리티시아마추어)를 4대 메이저로 꼽았다.
현대적 의미의 그랜드슬램은 아널드 파머(미국)가 출발점이다. 1960년 디오픈에 출전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 파머는 동승한 밥 드럼이라는 기자에게 마스터스와 US오픈, 디오픈, PGA 챔피언십 등 4대 메이저에서 우승하는 새로운 그랜드슬램에 대해 역설했고, 드럼의 기사화로 일반화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는 않았다.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미국)가 2000년 두 번째 메이저 US오픈 우승을 기점으로 디오픈과 PGA챔피언십, 이듬해인 2001년 마스터스까지 메이저 4연승이라는 신기원을 열었지만 '1년'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골프계에서는 그러자 '타이거슬램(Tiger Slam)'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아쉬움을 달랬다.
여자골프의 그랜드슬램은 사실 혼선도 있다. 웨스턴오픈(1930~67년)과 , 타이틀홀더스(1937~42, 1946~66, 1972년), 뒤모리에클래식(1979~2000년) 등이 메이저대회로 치러졌다가 사라지는 등 메이저대회 자체가 수없이 변경됐기 때문이다. 2001년 이후 나비스코챔피언십과 LPGA챔피언십, US여자오픈, 브리티시여자오픈 등으로 간신히 정리됐지만 올해 다시 에비앙챔피언십이 다섯 번째 메이저로 가세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의 흥행을 추구한 '꼼수'가 정작 박인비(25)의 그랜드슬램에 흠집을 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 언론은 실제 "예전의 4대 메이저에서 모두 우승하는 것과 현재 5개 메이저 중 4개를 우승하고 그랜드슬램으로 인정하는 것은 가치가 다르다"는 견해다. LPGA투어는 "박인비의 메이저 4연승은 그랜드슬램이 맞다"며 "에비앙챔피언십까지 우승하면 수퍼그랜드슬램"이라는 해석으로 맞서고 있다.
김현준 골프전문기자 golfkim@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