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론 편들어 준 최강희 감독 발언, 윤석영 선수 반발 이유 있다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최근 최강희 전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이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8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에는 성공했지만, 최근 이란과의 2014년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최종 예선전 마지막 경기에서 패하는 등 졸전을 거듭해 한국 축구의 수준을 떨어뜨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소속 전북팀에선 시종일관 상대방을 압박하는 강력한 공격 축구를 구사하는 한편 소탈한 리더십으로 '봉동 이장' 소리를 들으며 칭찬받던 최 감독은 국가대표팀을 이끌면서는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성과를 내놓고도 칭찬은 커녕 비난만 잔뜩 받는 신세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최 감독은 국가대표팀내 국내파-해외파간 갈등설의 중심에 서면서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게 됐다. 대표팀의 주축 미드필더인 기성용이 비밀 SNS 계정을 만들어 놓고 최 감독을 '씹어' 왔던 사실이 알려진 것은 치명타였다. 기성용의 잘못이긴 하지만, 어쨌던 최 감독이 지도자로서 축구계 대선배로서 소속 선수를, 축구계의 까마득한 후배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벌어진 일에 대해 최종적인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최 감독이 저지른 큰 실수가 또 하나 있다. 바로 '혈액형론'을 제기한 것이다. 최 감독은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혈액형과 혈액형으로 얼추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며 "B형은 성취욕이 강한 반면 O형은 성격은 좋지만 덜렁거리고 종종 집중력을 잃는다. 수비수로는 B형이 좋다"고 주장했다.
과연 최 감독의 말은 옳은 것일까? 수십년의 축구 선수ㆍ지도자로서 일선을 뛰어 온 최 감독의 의견이었지만 당장 거센 반발이 밀려왔다. 당장 윤석영 선수(퀸즈파크레인저스)가 해당 인터뷰 내용이 알려진 직후 SNS에 글을 올려 "2002월드컵 4강 - 이영표, 김태영, 최진철, 송종국. 2012올림픽 동메달 - 윤석영, 김영권 김창수 그리고 아쉽게 빠진 홍정호. 이상 모두 O형. 그 외 최고의 수비력 박지성 O형"이라고 지적했다.
윤 선수는 이 글이 파문을 일으키자 곧 "혈액형으로 성격을 평가하는 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해서 올린 글"이라며 최 감독에게 사과했지만 '혈액형론'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혈액형론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비과학적 상식 중 하나로 꼽히면서도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떨치고 있다. 문제는 혈액형론이 한 두가지 사례나 특징만 갖고 경상도ㆍ전라도 사람을 나누는 지역감정처럼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지역 감정을 악용해 정치적 이익을 취하는 집단이 있는 것처럼 혈액형론을 이용해 돈 벌이를 하는상업주의가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 감독은 전직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이라는 공인의 한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체험을 근거로 '혈액형론'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을 해 비과학적ㆍ상업주의적 혈액형론이 더 횡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혈액형론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또 혈액형론을 어느 정도 신봉하며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ABO식 혈행형 분류법은 1901년 오스트리아의 칼 랜트슈타이나의 발견에서 출발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혈액을 혈청응집반응 결과에 따라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혈액형은 1900년대 초 유럽에서 번진 파시즘을 타고 한때 유행하게 된다. 유럽인은 A형과 O형이 많고 아시아인은 B형이 많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자 B형은 열등하다는 인종차별적 우생학의 이론적 배경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러한 B형 열등론은 파시즘의 소멸과 함께 곧 사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유럽에선 이미 사라진 혈액형론을 되살린 곳은 일본이었다. 1927년 일본의 다케지 후루카와라는 철학 강사가 쓴 '혈액형을 통한 기질 연구'란 논문이 씨앗이 됐다. 그는 '인류 최초'로 혈액형과 인간의 성격을 결부시켰다. 내성적인 A형, 외향적인 B형, 성격좋은 O형, 이해타산적인 AB형 등의 성격 구분이 이때 이뤄졌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람이 의사, 과학자가 아닌 철학자라는 것이다.
이 씨앗은 1971년 일본의 방송작가 노미 마사히코가 쓴 '혈액형 인간학'이라는 책과 그의 아들 노미 도시타카가 쓴 '혈액형이 당신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책이 서점가에서 대히트를 치면서 현재의 혈액형론을 완성시켰다.
노미 마사히코는 그의 책에서 '수십만명을 대상으로 한 실제 연구에서 나온 결과'라며 A형은 내성적이고 성실하며, B형은 외향적이고 활달하며 사교적이나 바람둥이 기질이 강하고, AB형은 가치관이 뚜렷하고 이해타산적이고, O형은 성격 좋고 추진력이 강하며 리더십이 탁월하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이론은 합리적 성향이 강한 서구사회나 다른 지역에선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일본과 한국에선 마치 '정설'처럼 자리잡고 있다.
일본의 경우 혈액형별 교육방식을 채택한 보육시설이 있고, TV에선 아침마다 혈액형으로 보는 운세를 방송한다. 심지어 혈액형으로 병을 치료한다는 병원까지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도 혈액형론은 비상식ㆍ비과학적임에도 불구하고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지난 2004년 11월 대전에 위치한 농협중앙회 한밭사업단의 보험 담당 직원 채용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한밭사업단 측은 "혈액형 O형과 B형이신 분만 지원주세요, 다른 형은 지원 삼가 바랍니다. 다른 형은 추진력이 없어요"라는 공고를 내보냈다. 보험 업무에 O형과 B형이 적당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혈액형론'에 근거한 모집 공고였다.
이 공고는 거센 항의로 3일 만에 없었던 일이 됐지만, 한국 사회에 뿌리내려 있는 혈액형론의 실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아직도 거론되고 있다. 요즘에도 서점가에 혈액형별 주식투자법을 다룬 책자가 인기를 끌고 있는가 하면, 특히 유행에 민감한 어린 소녀ㆍ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데이트 짝ㆍ소개팅 상대ㆍ연애 대상을 찾을 때는 혈액형을 물어보는 게 필수 코스가 된 상태다.
그렇다면 전문가들은 혈액형론에 대해 어떻게 볼까?
한마디로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다. 예컨대, 골수 이식 환자들의 경우 기증자의 것으로 혈액형이 변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중 성격까지 달라진 사람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지난 2008년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김동욱 여의도성모병원 교수는 "지금까지 골수 이식으로 혈액형이 달라진 환자들을 2000~3000명 정도 봤는데 성격 달라졌다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며 "사람의 감성과 성격은 두뇌에서 컨트롤되는 반면 혈액형은 세포 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등 '소속' 자체가 다르다"고 말했다.
같은 기사에서 이규형 서울아산병원 혈액내과 교수도 "놀이와 과학을 구분 못 하면 어떡하느냐"며 "한두 가지 기준으로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의 특질을 구분하는 지역감정과 다를 게 없고 지역감정을 악용하는 사람이 있듯이 혈액형 구분도 이를 통해 돈을 벌려는 상업주의의 소산"이라고 비판했다.
김봉수 기자 bs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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