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6.25 전쟁 초기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피난민들로 가득한 한강 인도교가 국군에 의해 예고 없이 폭파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차량과 군인, 민간인 800여명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전쟁 발발 불과 3일 만에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앞에서 국군은 당황합니다. 이에 따라 한강 다리 폭파는 하루 전인 27일 오전 11시 군 수뇌부 회의에서 결정됐습니다.
회의에서는 시민들이 피난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28일 새벽 4로 폭파 시간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 계획보다 일찍 다리를 폭파시켜 버립니다. 게다가 다리 폭파계획은 군내부에서조차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한강 이북에서 북한군과 교전하던 우리 국군 4만 명 가량이 퇴로가 막혀버렸습니다.
당시 이응준 5사단장은 폭파 계획을 뒤늦게 알고 중지를 명령해 참모들이 저지 하러 가는 중이었으나 한 발 늦었습니다.
시민들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루 전 27일 이미 대전으로 피신해 있었고, 국방부와 국방장관도, 다리 폭파를 명령한 참모총장도 이미 서울을 빠져 나간 뒤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방송에서는 국군이 서울을 사수한다고 시민들을 안심시켰습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은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내용의 라디오 방송까지 했습니다.
결국 서울이 갑자기 고립돼 피난을 못한 12명의 제헌국회의원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납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나중에 서울 수복후에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북한에 부역한 사람들마저 이적행위자로 처벌하였으니 여론이 좋았을리 없었겠죠.
당시 납북된 제헌국회의원 12명의 가족들이 최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폭파는 고의나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며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한편 당시 한강인도교 폭파로 여론이 악화되자 정부는 엉뚱한 희생양을 만들어 냅니다. 명령을 내린 장군(명령자가 참모총장의 고문으로 있던 미군 장교라는 주장도 있습니다)은 그냥 두고 폭발을 담당했던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사형시켜 버린 것이죠.
당연하겠지만 그는 12년 뒤 재심을 통해 무죄 판정을 받았습니다. 억울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한강다리 폭파는 전쟁 초기 가장 뚜렷하게 국민을 실망시킨 대참사인 셈입니다.
백재현 뉴미디어본부장 itb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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