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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스토리 인물史]사마의, 권력의 찬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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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스토리 인물史]사마의, 권력의 찬탈자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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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179~251)는 삼국시대의 대표적 정치인이다. 위나라의 조조, 조비, 조예, 조방 4대 황제를 보필하였고 조조, 유비, 손권이 자웅을 겨룬 삼국의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유비는 유술(儒術)을, 조조는 법술(法術)을 구사했다면 사마의는 모략과 임기응변에 능한 음양술(陰陽術)의 대가이다. 중국에서 권력을 쟁취하려면 면후심흑(面厚心黑), 즉 낯이 두껍고 마음이 검어야 한다. 사마의는 마음의 검기가 조조에 버금가고, 얼굴의 두껍기가 유비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마의는 귀족 출신 사마방의 둘째로 어렸을 때부터 총명한 인물로 주목을 받았다. 형 사마량을 포함해 8형제가 모두 뛰어나 사마팔달(司馬八達)이라고 불렸다. 조조의 부름에 응해 위나라에 출사하였다. 정치, 군사 등 다방면에 통달하여 조조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219년 촉의 명장 관우가 위를 공격하고자 번성을 포위하였다. 조조는 도읍을 옮겨 위기를 모면할 생각으로 참모들의 의견을 구하였다. 사마의는 오의 손권에게 강남지역을 준다는 조건으로 관우를 공격하게 하면, 배후가 차단될 것이 우려되어 번성의 포위를 풀 것이므로 도읍을 옮길 필요가 없다고 진언하였다. 그의 계책대로 관우의 포위망이 풀려 조조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군인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식량을 조달하는 둔전제(屯田制)를 건의하여 만성적인 군량 부족 문제를 해소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촉한 제갈량의 5차례 북벌을 좌절시킨 것도 그의 뛰어난 지략 때문이었다. 제갈량은 227년 북벌에 나서면서 촉을 배신하고 위나라에 귀순한 신성태수 맹달을 설득하여 가세토록 했다. 맹달의 배신 의사를 감지한 사마의는 기습적으로 성을 포위해 맹달을 죽이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촉이 기산을 공격하면 맹달이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치려한 계책이 수포로 돌아갔다. 231년 4차 북벌 때도 전선에 도착한 후 성문을 굳게 닫고 촉군이 양식이 떨어져 철군할 때까지 버티는 지구전으로 일관하였다. '적을 피로하게 만들고 험한 요새에 의지해 싸움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북벌 방어전략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234년 5차 북벌 때에는 제갈량이 성을 굳건히 지키기만 하는 사마의를 격발하고자, 여자 옷을 보내어 겁쟁이로 조롱하는 계책을 부렸지만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숨을 거두고 위나라는 최대의 국난을 벗어나게 됐다.


소설 삼국지 106회와 107회는 '사마의가 꾀병으로 조상을 속이다' '위나라의 정치는 사마씨에게 돌아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명제 사후 8세 애제 조등이 즉위하자 사마의는 조상을 중심으로 한 조씨 왕족의 강력한 견제로 정치 이선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사마의는 조조의 말처럼 '남의 밑에 있을 인물'이 아니며 '어려서부터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는 야심'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청주자사 이승이 병문안을 핑계로 사마의의 근황을 살피러 오자 거짓으로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쇠약하고 병들어 조만간 병사할 것 같은 명연기를 보여 주었다. 결국 방심에 빠진 조상 일파가 한가로이 왕릉 참배로 도읍을 비운 사이 249년 전격적인 쿠데타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정변 성공 후 조상의 동생 조희는 "사마의의 계략은 비교할 수가 없다. 공명조차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우리 형제야 어떡하겠는가"하고 탄식하였다. 가히 고금에 비견할 바 없는 탁월한 속임수가 아닐 수 없다. 권력은 두 아들 사마사, 사마소를 거쳐 손자 사마염에게 승계되었고 280년 통일제국 서진을 건국하였다.


사마의는 허위와 간계로 천하를 속이고 왕조를 찬탈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너무 음흉하고 비열하였기에 세속의 권력은 얻었지만 천하의 인심을 잃게 되었다. 서진도 후계를 둘러싼 왕족 간의 정쟁으로 급격히 쇠락하여 강남으로 쫓겨나 지방정권인 동진 왕조로 전락하였다. 시인 두보는 제갈량을 "천하 영웅들의 옷깃을 눈물로 적시네"라고 애처로워했지만 사마의는 왕조의 찬탈자라는 준엄한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심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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