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전슬기 기자]
6월 2주 예스24 종합 부문 추천도서 3
아무런 정보도 없이 소설을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던 작품이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작품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작품을 집필한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기대감으로 신작을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매 작품마다 작가의 필력이 진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다. 나중에는 내용을 모르더라도 일단 작가의 이름만 믿고 주저 없이 작품을 선택 하기도 한다. 이름이 곧 브랜드화가 되어버린 작가들을 만나보자.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와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 2011년 베스트셀러 장편소설 『7년의 밤』의 작가 정유정의 신작 장편소설 『28』. 이 소설은 ‘불볕’이라는 뜻의 도시 ‘화양’에서 28일간 펼쳐지는 인간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존을 향한 갈망과 뜨거운 구원에 관한 이야기다.
전작들에 비해 스케일은 훨씬 커졌으며 도시를 종횡 하는 끔찍한 전염병과 봉쇄된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는 주인공들을 묘사하는 작가의 필치는 더욱 세밀하고 공고하다. 대학병원 수의학과와 응급의학과, 도청 방역과, 수사관, 특전사, 119구조대 등 전문가 취재로 리얼리티에 정교함을 더하고, 작가의 특장이자 낙관과도 같은 대담한 상상력으로 단순한 재난 스릴러와는 차원이 다른 또 한 편의 휴먼 드라마를 완성해냈다.
작가는 리얼리티 넘치는 세계관과 캐릭터 설정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무저갱으로 변해버린, 파괴된 인간들의 도시를 독자의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5명의 인물과 1마리 개의 시점을 톱니로 삼아 맞물린 6개의 서사적 톱니바퀴는 독자의 심장을 움켜쥔 채 현실 같은 이야기 속으로 치닫는다. 극도의 단문으로 밀어붙인 문장은 펄떡이며 살아 숨 쉬는 묘사와 폭발하는 이야기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며, 절망과 분노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은 강한 감동을 안겨준다. 이 소설은 모든 살아남고자 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10대 초반에 북한을 탈출해 전 세계를 떠돌아야 했던 한 소년 탈북자. 그는 평양에서 정치범 수용소로, 북-중 국경지대에서 상하이, 마카오, 서울, 멕시코 국경도시, 뉴욕을 거쳐 스위스의 베른에 이르는 긴 여행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정함과 부패로 가득 찬 세상과 홀로 맞닥뜨린다.
자폐증의 일종인 아스퍼거 환자인 주인공 안길모는 수학과 과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다. 그는 일반인들이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주인공이 자폐아라는 설정은 세계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독자 생존하는 북한 체제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세계를 거치는 길모의 여정은 자폐의 공화국인 북한이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시각과 서방세계와의 서툰 관계를 암시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희망과 화합, 인간애, 존재론적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기도 하다.
쥰페이는 자신이 속한 야쿠자 하야다 파 오야붕으로부터 상대 조직의 간부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쥰페이는 그것이 희망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자신에게 주어진 엄청난 기회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오야붕은 준페이에게 30만 엔과 함께 “사흘간 ‘사바세계’를 맛보고 오라”고 권한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결행일까지의 남은 기간인 그 사흘간 쥰페이는 평생 가 본 적 없는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 묵거나 짝사랑하는 댄스클럽 여인 가오리를 찾아가고, 우연히 만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며 평소 알고 지내던 트랜스젠더의 부탁으로 라이벌 조직원들과 혈투를 벌이기도 한다.
무심한 듯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오쿠다 히데오의 날카로운 시선은 이 소설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 인간 소외와 가족 해체, 청춘의 방황과 고통이라는 문제를 밑바닥 인생을 사는 쥰페이라는 야쿠자 청년을 통해 그려 낸 이 소설은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의 손에 걸리면 그 어떤 등장인물이라도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세간의 평가처럼, 어느 변두리 뒷골목에 가면 지금이라도 만날 수 있을 듯한 주인공 쥰페이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 또는 이웃들의 모습과 많은 부분 오버랩 되며 공감을 자아낸다.
전슬기 기자 sg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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