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오늘(12일)로 예정됐던 남북당국회담이 하루 전 무산됨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사진)의 대북 정책이 한 템포 쉬어갈 처지에 놓였다. 행보를 예측하기 어려운 북한을 대화의 문턱까지 걸어오게 만들며 "박근혜는 역시 다르다"는 호평을 받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역시 첫 시험대에 올려진 형국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12일 오전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박 대통령의 평소 지론을 전하며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것은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전날 회담 무산 소식이 전해진 직후 "굴욕ㆍ굴종을 요구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글로벌 스탠더드(국제기준)를 지켜라"고 강하게 비판한 것과 비교하면 다소 정제된 발언이지만 맥락은 그대로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원칙은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오는 데까지만 유효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현실적 수정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진다면 새 정부 대북정책은 거센 도전에 직면할 수 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 이산가족 상봉에 희망을 건 국민, 북한 리스크 해소를 애타게 기다려 온 모든 사람들도 '격(格) 논쟁'을 멈추고 한 발씩 양보해 대화에 나서라고 남북 양쪽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는 12일 오전 "남북이 기싸움ㆍ주도권 다툼을 벌일 만큼 한반도 안팎 상황은 한가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북당국회담 무산으로 인해 박 대통령의 대북 원칙론이 근본적으로 흔들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또 보름 후(27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도 앞두고 있어 북한을 압박할 기회는 충분하다며 '시간은 우리 편'이라 판단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북한을 다루는 방식이 그간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는 점에서도 이런 관측이 우세하다. '도발엔 응징을, 변화엔 아낌 없는 지원을'이란 깔끔한 메시지는 실제 효과를 발휘했다. 우리 정부는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대화하려면 서울로 오라"고 해서 관철시켰고, "개성에서 사전 실무접촉하자"는 북측 제안엔 "판문점 우리 쪽으로 내려오라"며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박 대통령은 대화의 문을 열어놓은 채 북한을 도덕적으로 압도할 또 다른 묘책을 강구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의 성과를 위해 몰상식을 용납한다면 남북관계의 원칙이 깨지고 협박과 타협의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게 박 대통령의 기본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회담의 결과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수석대표의 '급'에 집착해 일을 그르쳤다는 오해도 자연스럽게 풀릴 것으로 보인다. 취임 108일째를 맞는 12일, 아무런 공식일정을 잡지 않고 청와대에 머물고 있는 박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신범수 기자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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