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짐승들의 사생활 - 5장 저수지에서 만난 여인 (85)

시계아이콘읽는 시간1분 16초

짐승들의 사생활 - 5장 저수지에서 만난 여인 (85)
AD


마침내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이 한 점을 통과하는 지점, 즉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여자는 여전히 하림의 존재를 무시하는 양 선글라스 안의 시선을 무심히 앞에 던져두고 걸어갔고, 하림 역시 그녀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람처럼 가던 길로 계속 걸어갔다. 그러니까 가던 사람은 아무 일도 없는 양 계속 갔고, 오던 사람 역시 아무 일도 없는 양 계속 왔던 것이다.

잠깐 동안의 접점을 스치고 나자 두 사람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등을 마주한 채 점점 멀어져갔다. 순간 물오리 울음소리가 청량하게 대기에 울려 퍼졌다. 우루루 쿵쾅, 하는 공사장의 소리도 다시 들렸다. 하림은 다시 아까처럼 작대기로 길가의 마른 풀들을 툭툭 치며 걸어갔다.


그것뿐이었다. 짧다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하림은 흘낏 여자의 얼굴을 보았었다. 여자의 얼굴이 사진기에 찍히듯 하림의 뇌에 박혔다. 그리고 둘이 등을 마주한 채 멀어지고 있는 동안 사진은 현상되어 하림의 눈앞에 나타났다.
삼십대 후반의, 조금은 차갑고 기품있는 인상을 한 여자였다. 비록 선글라스로 가리긴 했지만 하얀 피부, 오똑한 콧날과 긴 목을 향해 부드럽게 흘러내린 턱선이 염소 수염 사내의 말처럼 그럭저럭 한 다발 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뽀족한 코와 뽀족한 턱끝이 왠지 모르게 신경질적이고, 도도하면서, 또한 심술궂은 느낌을 주고 있었는데 얼핏 입가에 냉소 같은 게 배여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이런 시골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지적인 여자라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여자군!
하림은 속으로 가만히 소리쳤다.
그러니까 아까 아침에 수도펌프 고치러온 사내와 이장 운학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자기네들끼리 이야기 하는 중에 등장했던 바로 그 이층집 여자였다. 물어보고 알아보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바닥에서 저런 차림에 저런 외모를 지닌 여자. 그렇다면 그들 이야기에 등장했던 바로 그 이층집 영감의 딸 밖에는 없었다.
미인이긴 한데 만만치는 않은 인상이군. 고집도 세어 보이고.... 송사장이란 작자와 대판 싸움을 벌였을 정도라면 성깔도 보통 아니라는 말이잖아. 어쨌거나 이장이 관심을 둘만한 인물이기는 하군.
하림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운학이 이 여자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운학이 어릴 때의 연모의 대상이었던 윤여사를 향해 ‘속물!’ 이라고 단언을 하면서 ‘그 여자보다 백배나 천배나 착한 마음을 지닌 천사 같은 여자’ 라든가, ‘고상한 인격을 지닌 여성’ 운운 하고 말했던 그 여자가 바로 저 여자라는 뜻이었다. 과연 천사와 같은지, 고상한 인격을 지녔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늙은 노총각 시골 이장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기엔 부족함이 없을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방죽을 건너 조금 더 가니 길이 끊어지고 대신 골짜기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왔다. 부셔진 작은 다리가 하나 놓여있었다. 다리 너머로 골짜기를 따라 띄엄띄엄 집들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골짜기와 저수지가 이어진 부분에는 한창 외팔을 휘두르면서 두 대의 포크레인이 굉음을 내지르며 산으로 돌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깍아내린 산 부위 벌건 흙이 마치 커다란 상채기처럼 흉측하게 드러나 있었다. 멀리서 들렸던 우루루 쾅쾅 거리던 소리의 정체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