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오늘 아침. 백범 김구와 아침상을 놓고 마주 앉은 윤봉길의 모습은 담담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그는 백범과 손목시계를 바꿔차고 자결용 폭탄까지 준비 한 뒤 홍구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불과 25세에 죽음의 길을 자처하고 떠나는 청년의 뒷모습을 보는 백범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19세에 야학 등을 통한 농촌계몽운동 만으로는 조국의 독립을 이룰수 없음을 깨달은 그였습니다. 결국 그는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글을 남기고 비장하게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오전 11시 40분께 천황 생일 기념식에서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 윤봉길 의사는 수통폭탄의 안전핀을 뽑은 후 단상위로 힘껏 던졌습니다. ...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놀라워했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합니다.
청년 윤봉길은 모진 고문 끝에 일본으로 압송돼 육군형무소에서 총살을 당합니다. 25세의 붉은 피를 쏟으며...일본은 그의 유해를 쓰레기 하치장에 버렸고 광복이 된 후에야 시신은 효창공원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거사를 며칠 앞두고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나의 빈 무덤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백재현 온라인뉴스본부장 itb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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