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이런 '썰풀기'가 유행했다. "우리 과에는 두 가지 종류의 학생이 있어. 김 교수의 강의를 이해한 학생과 그 강의에 해이한 학생." "그 강의 시간엔 또 두 가지 학생이 있어. 궁금한 내용을 묻는 학생과 머리를 책상에 묻는 학생." "미팅의 비극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지. 폭탄을 맞는 자와 폭탄을 지고온 자."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다 보면 뜻밖의 통찰을 얻기도 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지. 술을 먹고 돈을 내는 인간과 술을 먹고 학생증을 내는 인간." 대학사회의 빈부격차와 부의 양극화(?), 그리고 그 빈부격차를 낭만으로 승화시키되, 현실의 짙은 페이소스까지 담겨 있는 촌철살인이었다.
이런 분류가 우스개가 되는 것은, 기준이 자의적이기 때문일 텐데, 그것만 살짝 접어주면 문제의 핵심을 가끔 짚기도 한다. 여하튼 조금 무식하게 분류의 폭력을 한번 써보면, 지금 대한민국엔 두 가지 유형의 공무원이 있다. 창조경제를 이해하는 공무원과 창조경제를 오해하는 공무원.
무지(?)한 야당의원들이 청문회에서 물었다. "대체 창조경제가 뭡니까?"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가 열심히 설명했다. 야당의원이 일갈했다. "거참, 달리기 1등 하려면 1등으로 달리면 된다는 말과 다른 게 뭡니까?" 그 비유야말로 기발한 '창조'임엔 틀림없다.
말이란 게 두 개가 달라붙으니 무지 어려워진다. '경제'도 알 만한 낱말이고 '민주화'도 익숙한데 '경제민주화'가 되니 개념이 제각각이다. '창조'와 '경제'도 마찬가지다. 뭔가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게 '창조'고 그것이 '경제'와 붙은 것일 뿐인데, 왜 이렇게 우린 맨땅에 헤딩하는 것처럼 머리부터 띵한 것일까. 순수한 창의성도 창조, 기존의 뭔가가 융합하는 것도 창조, 없던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것도 창조. 거기다가 오지 않은 앞날을 잘 준비하는 걸 미래창조라고 하니, 영어 단어 외는 것처럼 이 문장에선 알았다 싶다가 다른 문장에선 다시 헷갈리기 시작하는 꼴이다.
대통령이 창조경제를 하겠다 하니 공무원들이 한때 입에 달고 다니던 '혁신(노무현정부)'도 뱉고, '녹색(이명박정부)'도 지우고, 이젠 저마다 '창조경제'다. 재계와 금융권까지 나서서 창조를 얘기하는 모양새는 더 우습다. 조금 있으면 대한민국 국민도 둘로 나뉠 판이다. '창조경제를 이해하는 국민과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으로.
<여하(如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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