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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초동(草洞)학교 신고식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1분 06초

글을 읽다 보면 익명으로 했더라도 "아, 이게 누구 글이지"하는 경우가 있다. 작가 성석제가 그런데, 그의 글은 수필이든 소설이든 티가 난다. 말에 말투가 있듯 글에도 사람의 색깔 같은 게 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다. 글의 정체성이란 면에서 좋은 것일 수도 있고, 상투성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정작 글을 쓰는 필자는 스스로의 문체를 잘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굳이 이를 의식해서 피하려고 하면 오히려 헛발질을 하니, 피하려고 해서 피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참 어렵다.

기자들의 스트레이트 기사에서도 독특한 고유의 문체가 있다. 스타일이라고까지 하긴 그렇고 이를테면 습관 같은 것이리라. P기자는 모든 기사에 특정한 리드를 고집한다. M기자는 기사의 날짜를 주어 바로 뒤에 넣는가 하면, 또 C기자는 술어 바로 앞에 넣는다. '~ 하는 것'이란 표현을 즐겨 쓰는 기자도 있고, 스트레이트 기사건 박스기사건 칼럼이건 모든 기사에 은유와 직유의 표현을 잔뜩 집어넣는 기자도 있다.


신문의 이 코너를 관장하는 모부장이 "기존에 보여준 페르소나(인격) 말고 살짝 자기를 바꿔서 글을 하나 써달라"고 주문한다. 글의 문체를 바꾸기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페르소나를 바꾸라니?

너무 어려운 주문이라고, 너무 많은 걸 요구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더니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경제신문에 실리는 칼럼들이 좀 딱딱하고 어려우니 독자들의 마음이 쉴 수 있는 쉼터 같은 지면이 필요하다. 그런 글들을 쓰다보면 필자 본인도 힐링이 되지 않겠느냐? 헐렁헐렁하게 잡문잡설을 쓰면서 세상을 여유롭게 보는 것도 나이 들면서 할 수 있는 수행이라 할 수 있지 않느냐?" 조목조목 옳은 말씀. 거부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오늘의 초동여담이다.


나처럼 팩트와 직설로 살아온 인생이 "흐르는 강물 같은" 글을 쓰려면 정말 100일 기도라도 드려야 할 판이다. 무르팍이 너덜거려야 도가 통하지 않겠는가. 존경하는 그 부장께선 이런 먹먹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5분 전에 말씀해놓고 원고 언제 나오느냐고 재촉이시다. 모르겠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서 있는 내 글들을 반듯한 칼럼으로 바꿔놓든지, 아니면 내가 진짜로 취권이라도 배워 헐렁해지든지. 둘 중 하나렷다. "나쁜 사람, 나쁜 사람."


글=여하(如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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