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을 넘어선 새벽까지 쉰 목소리로 얘기 나눌 수 있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시를 읽어주고 문자를 따뜻이 데워주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허기지는 깊은 외로움 속을 가끔 기웃거리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행간(行間) 깊은 곳까지 따라와 말줄임표까지 소리 내어 읽을 줄 아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싶던 얘기를 먼저 꺼내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언어들의 끝이 끝없이 따뜻해져서 이 느낌들만으로도 사랑의 가건물 한 동 짓고도 남겠다 싶은 그런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계절이 뒤바뀌는 뒤숭숭한 날에 함께 차창 열고 짙어가는 바람냄새 맡을 수 있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헤어지는 일이 아쉽지 않고 후두부 어디 쯤엔가 따뜻하게 배어 있는 배후 같은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늙어가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늙은 표정의 여유와 은은한 미소와 담담한 슬픔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밤중에 함께 마시는 차 한잔, 후루룩 입술에 닿는 물소리가 정겨운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재미없는 영화를 함께 보고난 뒤 눈을 맞추며 킥킥거릴 수 있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그 책의 어떤 대목에 줄 치고 있느냐고 물을 수 있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잠 오지 않는 날 밤새도록 쪽지글 나눌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못생긴 생각들 어설픈 욕망들도 그 맑은 거울을 만나면 이내 아름다워지고 순결해지는 그런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거짓말들에 지친 입과 귀를 쉬게 하는 순정의 언어들을 들려주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이름과 그 얼굴과 그 생각이 아주 담박해서 어쩌면 떠오르지도 않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 곁에 감도는 공기, 휘발하는 계절의 기분, 어느 날 발 담근 계곡물의 간지럼, 깊이 전해오는 해묵고 새로운 슬픔 같은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밤늦게 달려간 인사동 어느 포장마차에서 소주잔 가득 술을 따른 뒤 내 잔입술을 톡 치며 건배하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비틀거리는 등을 톡톡 쳐주며 택시를 잡아주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대를 위해 남은 인생의 한 반쯤 떼어주고 싶은 욕심이 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 눈이 멀어 떠도는 시간의 남루를 잊을 수 있는 그런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가진 기억이 이미 한 생애를 적셔 이대로 헤어져도 여한이 없을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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