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근대회화 한자리에서 만난다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체코의 국보급 근대미술 작품들이 방한했다. 유럽의 대표 미술관 중 하나인 프라하국립미술관의 소장품들이 국내최초로 유치돼 전시가 개막한 것. 25일부터 오는 4월 21일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격동의 역사를 거치며 구축된 체코 근대 미술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체코는 슬라브, 보헤미아 등의 고유한 민족 문화를 바탕으로 일찍이 빈, 파리 등지의 서유럽 문화와 교류하면서 뛰어난 문화적 역량을 지니게 됐다. 미술과 더불어 음악, 문학 등의 장르는 그 수준이 매우 높아 유럽 전역에 큰 파급력을 가졌다.
근대기 체코는 제국주의의 쇠퇴와 더불어 민족주의의 급부상, 1차 세계대전 발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탄생, 사회주의의 대두, 서구 근대 시스템의 도입 등 정치·사회적 격변기를 지나왔다. 혼란의 시기 체코의 미술가들은 새로운 관점의 변화를 택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자문하며 그것을 작품에 담아내고자 했고,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자발적으로 수용해 나갔다.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는 "체코 예술가들의 진보적인 예술 활동은 외부의 자극과 충격에 노출되기 시작했던 대한제국-일제강점기 한국 미술가들의 정체성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며 "체코와 버금가는 정치 사회적 혼란을 겪었던 근대기 한국미술가들의 사유과정을 다른 각도로 해석해보고, 나아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자문하는 시간을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이어 "체코 근대 미술을 단순한 수준으로 범주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각적인 층위에서 인식하고 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며 "한국미술계의 관심과 전시가 미국이나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미술에 집중돼 왔는데, 특정 지역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이같이 제3세계 등 다양한 국가들의 미술현상을 보여주는 전시들을 많이 기획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1905년부터 1943년까지 체코를 배경으로 활동한 주요화가 28명의 회화작품 107점이 선보인다. 총 3부로 나눠져 시대 순으로 구성했다. 우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점차 프랑스 파리 등지까지 해외로 뻗어간 유학파 작가들을 중심으로 서유럽 미술의 영향이 두드러진 시기의 작품들이다. 특히 1905년 프라하에서 개최된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전시회는 젊은 체코 화가들을 자극했다. 그 영향으로 체코 작가들은 입체주의적 시각 언어로 변형된 표현주의 경향을 나타냈다. 1910년대에 등장한 '체코 큐비즘'은 색다른 형태와 조형어법으로 체코 근대 미술에서 확고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당시 대표 작가인 프란티셰크 쿠프카는 어린시절 체코가 오스트리아 헝가리안 제국의 일부였던 만큼 프로이트, 클림트와 같은 예술가와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쿠프카는 파리에 정착한 후 가난한 시절을 지냈지만 아내 유제니 스트롭과 결혼한 후 추상경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쿠프카가 젊은 시절 도상학의 고전적 주제인 고대 신화에서 모티프를 응용했다면 적색과 녹색의 보색대비와 거친 붓터치, 극적인 명암효과 등으로 기법면에서 달라진 면을 볼 수있다.
2부에선 1918년부터 1930년까지의 작품들이 전시된다. 1918년은 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이 독립해 새롭게 건국한 해다. 화가들은 보다 독창적이고 전위적인 경향들에 관심을 가지게 돼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아방가르드 미술이 등장했다. 형식적 양상과 내용에 낙천주의적이며 유희적인 접근이 주입됐으며, 다른 한편으로 진지한 사회주의적 주제, 풍경화와 여성 누드와 같은 주제가 다뤄졌다.
여성 작가인 블라스타 보스트체발로바-피쉐로바의 '1922년의 레트나'를 보자. 레트나는 프라하 성 인근에 위치한 언덕으로 큰 공원이 많아 사람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이 공원의 일상적인 인물과 건물, 거리풍경이 간결한 색채와 선으로 표현돼 있다. 작가는 특히 프로레타리아 미술개념을 표방했던 이리 볼커(Jiri Wolker)의 문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고 작품에서 사실주의로 나타났다. 현대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차별당하고 무시된 개인과 계층의 삶, 정신에 대한 동정심이 기인돼 있다는 평이다.
1931년이후 1943년까지 체코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다양성을 잃지 않는 가운데 자신들의 작품을 서유럽미술과 차별화하고, 전체주의의 권력에 저항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이데올로기로부터 초월하려는 태도, 자유의 추구와 인간성 회복 등이 주제로 담겼다. 또한 감성적이고 유머러스한 작품들도 대거 등장한다. 특히 이 시기부터는 체코 미술에 추상미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상상력이 넘치는 초현실주의 그림들도 볼수 있는데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초래한 정치·사회적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에밀 필라는 1910년부터 피카소와 브라크로부터 영향받아 큐비즘 양식으로 작업하다 1929년부터 입체주의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1930년대에는 인간과 동물의 싸움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작품 화면의 서사적인 구조는 특히 19세기 시인 카렐 야로미르 에르벤의 낭만시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에르벤은 체코 신화, 민화를 수집해 책으로 발간하거나 낭만시를 저술하면서 체코 전통민속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이끌어낸 이다. 에밀 필라는 이처럼 저항 의지를 품고 1930년대 파시즘의 잔혹한 시대상을 그림으로 표현해 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초기작품부터 후기작품까지 총 19점이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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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희 기자 val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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