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연미 기자]
적어도 '여의도'라는 지리적·심리적 공간에선 우리말 문법이 통하지 않는다. '돈 걱정 없는 복지'나 '모두를 승리자로 만드는 경쟁' 같은 불완전한 약속들이 버젓이 진열돼 팔려 나간다.
모순으로 빚은 이 제품은 유통기한이 짧다. 여의도를 벗어나면 깨지거나 변질되기 십상이다. KS마크를 붙일 수 없는 이 제품(공약)을 시장(국민)에 유통시킬 것이냐. 이걸 두고 요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정부 부처가 소란스럽다.
박근혜 정부가 나랏돈 들여 지켜야 하는 공약은 무려 252개다. 돈줄을 찾지 못한 채 지키겠다 덤비면 결과는 비디오다. 거덜나거나 무안하거나.
한데 계산기도 제대로 두드려보지 않은 인수위는 현실을 말하는 정부에 호통을 친다. 보건복지부는 당선인의 기초노령연금 두 배 인상 공약을 지키기 어렵다고 했다가 공개 경고를 받았다. 신용불량자와 하우스푸어를 나랏돈으로 구제하는 데 반대한 금융위원회는 15일 업무보고 직전 방향을 틀었다. 박 대통령 당선인이 말한 '작은 인수위'의 엄포에 '5년간 131조원이 필요하다'는 현실은 숨어버렸다.
'약속한 건 지킨다'는 대전제는 위기의 순간마다 박 당선인을 건져 올렸다. 선거 기간에 했던 달콤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당선인의 고집이 이해된다. 하지만 400페이지에 이르는 공약집 내용을 숙제처럼 지키려는 강박은 버려도 좋다.
당선인은 불필요한 세출을 줄이고 세입을 늘려 공약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한데 사실 이건 아주 오래된 농담이다. 새 정부가 등장할 때마다 지하경제 양성화와 세출 구조조정은 넉넉한 복지의 디딤돌로 꼽혔지만 매번 기대치를 밑돌았다.
기초노령연금 인상처럼 유턴 불가능한 정책엔 좀 더 뜸을 들여도 좋다. 성실한 채무자를 서운하게 만들 하우스푸어·가계부채 대책엔 비상 깜빡이를 켜도 괜찮다.
지금,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잠행 중인 당선인에게 권한다. '뚝딱 만들어낸 그 공약 못 지킵니다' 솔직한 고백도 '정직하겠노라' 약속했던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라고.
박연미 기자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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