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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34>무정부 혼란속 태어난 경제단체들, 기업보국을 외쳤다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분 55초

상공회의소와 무역협회의 탄생

전용순·민규식 등 중심 조선상공회의소 첫발
105개 무역업체, 무역협회로…산파역 김도연 정계 진출도
조선방직협 등 창립 잇달아

[한국기업성장史]<34>무정부 혼란속 태어난 경제단체들, 기업보국을 외쳤다 경성조선상공회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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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의 철도공작창 철도노조원 3000여명이 파업을 벌인데 이어, 부산에서도 철도노조원 8000여명이 가세했다. 며칠 뒤엔 서울의 출판노동조합과 대구 지방의 우편국 조합원들까지 동조하고 나서면서, 파업은 전국 규모로 확산돼 나갔다. 이른바 '9월 총파업'의 시작이었다.

전평은 곧 총파업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했다. 전평은 경제적 요구 이 외에도 정치범의 석방과 반동 테러 배격, 정간된 좌익계 신문의 복간,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파업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며,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하여 남조선의 4만 철도노동자를 선두로 사생존망의 일대 민족투쟁을 개시한다'고 파업 목적을 선언했다.


미군정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고 비난했다. 군정장관 러치가 특별담화를 통해 모든 파업자들을 구속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노조 간부와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다.

이윽고 9월30일 미군정은 경찰, 우익 청년단체를 동원해 전평의 총파업투쟁위원회가 자리한 용산의 철도공작창을 습격했는데, 파업 진압은 곧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가장 잔인한 면모를 발휘한 건 종로주먹 김두한의 대한민청단이었다. 그의 증언이다.


'…수도청의 장(장택상) 청장을 만났다. 당신들의 힘으로 전평 파업을 수습할 능력이 없으니 나에게 무기를 달라고 호소했다. 장 청장도 사태의 긴급에 비춰 나에게 경찰전문학교의 실습용 총 300여정과 수류탄 3상자를 넘겨주었다. 물론 38, 99식이다. 나는 부하들에게 일러 죽창을 준비시켰다. … 나는 3000여명의 대원들을 시 경찰국 앞에 모이게 했다. 당시 시 경찰국 자리가 옛날엔 금천대회관이었다. 나는 그 집에 산적한 정종 수십 통을 도끼로 깨고 3000여명의 대원들에게 아침부터 술을 먹였다. 술을 먹을 줄 아는 자고 아니고 간에 작전상 다 먹였다. 나도 간부들과 함께 아침부터 위스키를 마셔 우리의 정신을 마취시켰다. 그러지 않고서야 용산역 기관실의 2층, 3층에 세워둔 기관총, 장총의 총구를 보고 그 앞에 뛰어들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청이 불하하기 시작한 적산기업 또한 부정과 정실로 얼룩졌다. 주인 없는 황금 거위를 두고 연일 암투가 벌어지기 일쑤였으며, 미군정의 '백'을 업고 온갖 행패가 자행되기도 했다. 경제 활동은 어느 구석 한 가지 정상인 것이 없었고, 모리배들이 설쳐대는 무법천지였을 따름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몇몇 뜻있는 경제인들을 중심으로 경제 질서부터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경제단체를 구성해 혼탁한 분위기를 정화하고 질서를 올바르게 세우자는 움직임이었다.


마침내 경제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민규식(영보부동산), 이동선(조선한약), 전용순(금강제약), 최순주(조선은행 이사), 이정재(풍림철강), 전항섭(조선연탄), 김명하(조선목재), 김용주(국산자동차), 최두선(경성방직), 이강현(조선섬유공업), 김익균(건설실업), 유일한(유한양행) 등이 회합을 갖고, 조선상공회의소 설립을 합의한 뒤 창립총회를 열어 정식으로 출범케 됐다. 조선상공회의소의 설립 취지문에는 당시 우리 경제의 처지와 열망이 그 얼마나 시급하고 간절한 것이었는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군국주의 일본의 가혹한 착취와 악독한 압박 아래서 우리 조선 3000만 민중은 경제적으로는 껍질만 남고 정신적으로는 허수아비가 돼 버렸습니다. 그러나 패전 일본의 철쇄가 파괴돼 우리는 노예의 생활에서 해방돼 새로운 광명이 빛나는 위대한 희망을 가지고 자주독립의 새 조선을 건설하게 됐습니다. 과거 우리 경제계를 대관하면 본래가 자주력 없는 경제라서 그것은 오로지 일본의 발전을 위한 것이었으며, 국민의 총력을 들여 오직 전쟁 수행에만 일관했던 것입니다. 그리해 해방 이후 산업계가 혼란 상태에 빠져 상공업계는 물자 결핍으로 인해 극도로 부진 상태에 있으며, 일반 대중은 일용 필수품 구독난과 물가고로 인해 그 생활의 고통은 날로 가중돼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상시를 당해 군정당국의 시책에 아울러 민간총력을 망라한 유력 기관으로서 상공회의소의 활동에 크게 기대하는 바입니다….'


조선상공회의소 설립에는 막후인물로 전용순이 산파역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개성 출신의 전용순은 선린상업을 거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고학을 하며 한국어 약품광고를 대행해주던 게 동기가 돼 독학으로 의사 시험도 치르고 약사 시험에도 합격하면서 제약업에 투신해 성공한 기업가였다. 그는 초대 회장 민규식, 2대 유일한, 3대 이동선에 이어 4대 회장으로 선임됐는데, 불과 2년여 동안에 4명의 회장이 바뀌었던 건 당시 경제계의 불안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조선상공회의소 다음으로 결성된 경제단체는 무역협회였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정크무역에 이은 마카오 무역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실제로 해방 직후 기업가들이 할 수 있는 기업 활동이라곤 그런 무역 밖에는 또 없었다. 더욱이 일제의 약탈 물자를 물물 교환하면서 시작된 무역은 해방 이후 유일한 호황 업종이기조차 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역은 대부분 미군정의 손에 의해 영위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우리 무역의 자주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진즉부터 얘기돼오던 터였다. 또 그를 위해 대외무역기구의 설치 문제가 활발히 논의되던 중에, 마침내 105개 무역업체가 한자리에 모여 창립총회를 갖고 무역협회를 정식으로 출범하게 됐다.


'우리에게도 광명한 천지는 왔다. 수동적 무역, 독점적 무역, 착취적 무역 시대는 물러가고 우호적이며 자주 경제적 무역시대가 왔다. 우리 민족은 일본제국주의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돼 완전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이 때, 산업경제와 무역 방침의 대계를 확립함이 목전의 긴급사이니 이에 우리 동지는 무역의 진흥에 각각의 경험과 지식과 열의를 경주해 신국가 건설의 일부 면을 담당하려는 바이다….'


당시 무역협회 설립엔 김도연이 막후에서 산파역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도연은 일본 게이오대학을 거쳐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취득하고 돌아와, 잠시 연희전문에서 교수를 하다 흥업사를 설립하면서 경제계에 뛰어든 인물이다.


해방 이후에는 정계에도 뛰어들었다. 한국민주당의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가까이 지내던 김성수, 장덕수 등과 상의한 끝에 무법천지나 다름없는 무역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반 좌익 활동을 하고 있던 이활 등의 지원을 받아 무역협회를 창립한 것이다.


무역협회는 지금의 을지로 입구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던 조선척식은행에 사무실을 얻으면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수출 규모 350만달러를 시작으로 지금의 무역 1조달러를 위한 대장정에 들어갔다. 초대 회장에 김도연, 상무 이활, 비상근 부회장에는 전용순과 김인형(동아상사)이, 이사에는 강석천(한국물산)과 주요한(상호무역), 유일한 등이 각기 추대돼 진용을 갖추었다. 당시 이들은 무법천지의 혼란 속에서도 무역업이 유일하게 호황을 누리고 있는 업종이었던 만큼 이내 경제계를 이끌어가는 리더로 떠올랐다.


하지만 정부 수립 이후 김도연이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재무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앉게 되면서 변동이 있었다. 김도연에 이어 이활 상무가 회장에 취임하고, 무역협회 창립 과정에서부터 실무 책임을 맡았던 조사부장 나익진이 전무로 승진했다.


해방 직후 조선상공회의소와 무역협회가 잇달아 출범한 그 이듬해에는 조선방직협회가 창립을 서둘렀다. 사실 방직은 우리 근대산업을 열고 이끈 중추였다. 일찍이 1917년 일본의 재벌 미쓰이물산이 부산에 조선방직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의 거대 방직 자본이 현해탄을 건너 밀려들었다. 그런 가운데 '조선인들이 옷을 해 입기 위해 한 해 동안 일본에서 들여오는 광목 값으로 연간 2700원(지금 돈 약 3조2400억원)이 새어나간다'는 소릴 들은 김성수가 민족자본을 결집시켜 출발한 경성방직은, 초기의 시련을 딛고 일어나 오래지 않아 일본의 거대 자본인 미쓰인물산의 조선방직, 도요방적, 가네가후지방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선 4대방(大紡)'으로 올라섰다. 이 4대방은 원면에서 면사를 생산해 최종 제품까지 제조하는 일관생산 체제를 갖춘, 본격적인 근대적 면방직 공장들이었다. 한데 해방 이후 4대방은 일시 조업 중단 상태에 들어갔다. 원면에서부터 원료에 이르기까지 정상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경방을 필두로 이내 모든 공장들이 정상을 되찾아 갔고, 시설을 정비하며 조업 재개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원면 부족이 심각한 상태였다. 해방 이후 원면 재배 면적과 수확량이 급감한데다, 수집량까지 감소했기 때문이다. 원면 수확량과 수집량은 해방 이전과 비교할 때 차이가 너무도 컸다.


원면 수확량은 해방 이전 2억4200만 근이었으나, 해방 이후 5550만 근으로 크게 줄었다. 수확한 원면 수집 비율도 해방 이전 60% 안팎에서 해방 이후 10%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원면 자급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미군정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해방 이듬해 봄에 원료난을 해결하기 위해 국산 면 증산 정책을 펼쳤으나, 농민들의 반발에 부딪치고 작황마저 부진해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면서 원면 부족으로 조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방직업계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원료 수급을 비롯해 방직공장 정상 운영을 포함한 면방직업계 제반 정책의 일원화를 관계 요로에 건의할 수 있는 협의체 구성이 당장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하여 1947년 4월, 조업 중이던 방직공장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마침내 경방, 조방, 고려방직의 영등포·광주·춘천·전주공장, 대한방직의 영등포·대구·목포공장, 제일방적의 영등포·인천·송고실업장, 대아방직, 대전방직, 조선제마, 밀양모직 등이 주축이 되고, 나머지 방직공장 전체가 참여한 조선방직협회가 창립됐다. 초대 회장은 경방의 김용완이 추대됐으며, 전무에는 메리야스 공장을 경영하던 김상형이 맡았다.


그런가하면 조선공업기술협회의 경우 협회에 참가한 단체만 해도 조선공업기술자협회, 학술원, 광공부 조선공업기술자연맹, 조선공업동지회, 조선건축기술단, 조선기계기술협회, 통신기술자연맹, 교통국자치위원회 등 8개 단체를 헤아릴 정도였다.


그밖에도 결성된 경제단체가 적지 않았다. 조선잠사회, 조선연료협회, 조선섬유산업건설동맹, 인천공업자협회 등이 하루가 멀다 하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처럼 해방 직후 우리 경제계는 조선상공회의소, 무역협회, 조선방직협회 등 경제단체를 결성하면서 구심점을 찾아나갔다. 그리고 그 구심점 안에 당대 내로라는 기업가들이 모두 한데 모여 저마다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무정부의 혼란 상태 속에서도 목소리를 일원화해 오늘에 이르는 대장정을 스스로 열어나간 것이다.
박상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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