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한 점 없는 복도를 사이에 둔 두 개의 교실. 한쪽에는 고장 난 에어컨을 대신한 부채를 손에 든 어른들이 가득하고, 다른 쪽은 긴팔 상의 위에 겨울 교복을 껴입은 남학생들로 들어찼다. 시간을 거슬러 15년 전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tvN <응답하라 1997>은 이제 계절마저 자유롭게 바꾸어 버린다. 가을 교복을 입었냐는 질문에 “아유, 겨울이에요. 생겨울!”이라고 손사래를 치는 은지는 “그래도 아까 저거 입을 때보다는 나아요. 히힛”이라며 구석에 놓인 왕년의 국민 아이템 ‘떡볶이 코트’를 가리키고, 잠깐 짬이 난 윤윤제 역의 서인국은 땀이 범벅된 얼굴로 교실을 뛰쳐나와 황급히 부채를 찾는다. 한증막 같은 촬영 현장의 효과일까. 유난히 두꺼운 스웨터를 입고 “온몸이 다 젖어뿌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는 부채 바람에 얼굴이 소멸될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살이 부쩍 빠져 있지만 짓궂은 신원호 감독은 “윤윤제! 내복 입었냐. 대본에 그렇게 쓰여 있는데?”라며 뜨거운 농담을 던지고, 다시 카메라 앞으로 향하며 “예, 내복...... 준비하겠심더”라고 받아치는 서인국의 심각한 표정은 영락없는 윤윤제의 얼굴이다. 이미 티셔츠 등판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감독이 카메라 앞의 불지옥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소품을 챙기려 달려가는 스태프에게 “뛰지마. 그러다 너 탈진해!”라고 나쁜남자 스타일로 속마음을 전하는 것이 말복의 한낮, 음식물 반입이 금지된 교정에서 촬영하는 팀의 리더가 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위로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전원 탈진 직전의 상황에서도 무한 체력과 주체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나발나발’ 신나게 떠들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다름 아닌 방성재 역의 이시언이다. 두건을 쓴 머리를 매만지며 꼬리빗으로 앞머리를 샥샥 빗어내더니 어느새 강준희처럼 얌전하게 앉아 있는 호야와 어깨동무를 하고 장난스러운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은지원과 키득거리며 자신의 싸인을 완성하겠노라 큰소리를 치더니, 잠깐 한눈을 팔면 다른 곳에서 “트위터에 방성재 봇 운영하는 분 누군지 아세요? 우와, 여자분이라고요?”라며 수다 삼매경이다. 에너지가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그는 운동장으로 장소를 바꾸어서도 여전히 지치는 기색이 없다. 편한 장난인지, 진지한 대본 연습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사투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인 와중에도 “우헤헤헤헤헤헤헤” 하는 그의 목소리는 멀리까지 울려 퍼진다. 그리고 “하이고, 궁예 같다. 궁예”라는 은지의 타박이 꼬리처럼 따라붙는다. 고달프고 힘들어도 웃기를 멈추지 않는다. <응답하라 1997>의 현장에도, 드라마에도 엄마미소가 지어지는 건 거기 진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 찰떡처럼 달콤하고 든든한 드라마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다음 주 화요일 밤 11시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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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윤희성 nine@
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10 아시아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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