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축구 종가 영국의 슈팅을 막았다. 74500여명의 함성도 이겼다. 그 사이 2년여 전 아픔은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대한민국의 수문장 이범영이다.
이범영은 5일(한국시간) 영국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2 런던올림픽 남자 축구 영국과의 8강전 1-1로 팽팽하던 후반 17분 교체로 그라운드를 밟았다. 갑작스런 호출이었다. 주전 골키퍼 정성룡이 골문으로 쇄도하던 마이카 리차즈와의 충돌에서 머리, 팔 등에 부상을 입어 서둘러 스파이크 끈을 동여맸다.
이번 대회 첫 출전. 출발은 다소 불안했다. 수비진이 건넨 볼을 제대로 걷어내지 못해 위기를 초래했다. 골킥을 찬 이후 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뒤의 플레이는 온갖 우려를 불식시키기 충분했다. 수비진과의 안정된 호흡으로 상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했고, 이어진 연장전에서도 잇단 위기를 차분하게 넘겼다.
그리고 맞이한 승부차기. 이범영은 영국의 키커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슈팅을 막아내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상황은 그만큼 절실하고 긴박했다. 세 가지 장애를 뛰어넘어야 했다. 라이언 긱스, 애런 램지, 다니엘 스터리지 등 화려한 슈퍼스타들의 슈팅, 영국을 향한 74500여 관중의 뜨거운 응원, 2년여 전 승부차기에서의 아픈 기억이다.
트라우마의 근원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이다. 이범영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와의 준결승전 0-0으로 팽팽하던 연장 후반 15분 교체 투입돼 골문을 맡았다. 승부차기를 대비해 홍명보 감독이 꺼내든 마지막 카드였다. 하지만 종료 직전 그는 아흐메드 알리 알아브리의 슈팅을 막아내지 못했고 결국 대표팀은 0-1로 무릎을 꿇었다. 투입과 동시에 실점을 내준 이범영에게 온갖 비난이 쏟아진 건 당연지사. 결승 진출 불발은 물론 선수단의 병역 특례 혜택까지 날아가 그는 적잖은 시간을 자책감에 빠져 지내야 했다.
하지만 이범영은 다시 스파이크 끈을 조여맸다. 하강진, 김승규 등과의 경쟁을 뚫고 다시 한 번 대표팀에 합류했다. 홍명보 감독은 2년여 전처럼 그의 승부차기 방어 능력을 신뢰했다. 끊임없는 믿음에 제자는 화답했다. 첫 번째 키커 램지에게 골을 내줬지만 두 번째 키커 톰 클레벌리의 킥 방향을 읽으며 동료들의 마음에 믿음을 심어줬다.
그리고 맞이한 마지막 키커 스터리지와의 대결. 이범영은 뒤로 물러나는 188cm의 상대를 매섭게 응시했다. 이어진 주심의 호각소리. 스터리지는 슈팅을 위해 쏜살같이 달려오다 멈칫거리며 방어 타이밍을 뺏으려 했다. 속임수에 이범영은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가 줄어든 스터리지의 몸이 오른 방향으로 살짝 치우진 것을 포착, 인사이드로 찰 것을 예측하고 빠르게 몸을 허공에 띄웠다. 슈팅은 예상대로 오른쪽을 향했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이범영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안전하게 두 손으로 펀칭을 시도해 골문을 지켜냈다.
일순간 조용해진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 이범영은 두 손을 불끈 쥐며 포효했고, 스터리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대한민국의 사상 첫 올림픽 4강 신화는 그렇게 작성됐다.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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