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IT)의 발전과 함께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양산되고 있다. 컴퓨터는 물론 스마트폰, 스마트TV, 인터넷 검색 엔진, 대중교통 시스템, 영화 예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정보 네트워크가 확산되면서 수많은 데이터들이 생성되고 소멸된다. 이른바 빅 데이터 시대다.
IT의 발달은 우리 생활의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우리 생활에 직접적 변화를 가져왔다. 가령 스마트폰은 TV나 신문 역할뿐만 아니라 때로는 내비게이션으로 변하기도 하고, 나의 하루를 관리해 주는 친절한 비서로 변신하기도 한다. 소리없이 다가온 정보화 시대는 정보의 과다를 넘어 정보의 홍수 시대로, 정보의 폭발을 넘어 정보의 공해 시대로까지 접어들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시대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분야 중의 하나가 의료 분야, 특히 한의사를 포함한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된다.
고전적인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전문성, 즉 한쪽이 일방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관계였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병원에 대한 느낌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알아볼 수 없이 휘갈겨 쓴 영어 의료 차트, 의사 선생님께 질문 하나를 던지기 위해 느끼는 부담감, 진료책상 너머로 진열되어 있는 두꺼운 전문서적들, 권위적이고 근엄함이 묻어나는 '말씀'. 물론 당시에도 의사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의사의 전문성에 대한 옹호와 비판은 오직 의사들이 하는 것이지 환자의 영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정보의 폭발 시대에 그 관계가 변하고 있다. IT의 발달로 인해 과거 의사ㆍ환자 간의 수직적 권위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미 과거의 의사ㆍ환자 관계로는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상황이 왔다. 이미 환자들은 예전의 그 '근엄한 말씀'에 의존하는 환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주변에 널린 첨단 IT 기기들을 통해 전 세계의 의학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똑똑한' 환자들이다.
게다가 여러 질환에 대해서 공부해야 하는 의사와 달리 환자들은 본인의 질병에 대해 집중적으로 학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결혼도 하지 않은 '신참' 총각 의사가 둘째 아이의 아토피를 상담하러 온 엄마에게 아토피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첫째 아이를 키우면서 몸에 밴 노하우와 아줌마들 간의 정보, 결정적으로 인터넷 웹서핑과 인터넷 상담 등을 통해 '이론과 실제'를 갖춘 엄마이기 때문이다. 이런 엄마와 일전을 벌이는 신참 총각 의사는 반격이 쉽지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히 진료실의 의사 선생님도 '소통'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진료실은 바야흐로 더 이상 감추어진 성역이 아니다. 아토피 엄마와의 커뮤니케이션은 호평이든 악평이든 온 인터넷을 떠돌아 다닐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미 많은 환우회와 육아 사이트에는 병원과 의사에 대한 평가가 넘쳐나고 있다.
그러면 미래는 어떨까. 이 흐름이 반대로 갈 것 같지는 않다. 앞으로도 의사ㆍ환자의 관계는 점차 수직에서 수평으로 이동할 것이다. 미래의 의사ㆍ환자의 관계는 아마 조언자 내지는 동반자의 역할로 변화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단기적으로는 느리게 변화하는 직업문화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문화 사이에서 의사ㆍ환자 사이의 갈등과 부적응을 만들어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대화와 소통 중심의 새로운 수평적 권위를 형성할 수 있는 긍정적인 문화를 형성할 것이다. 정보 홍수 시대, 정보 폭발의 시대에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얘기했지만 면허와 전문 지식으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왔던 다른 전문직능 분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기술 변화에 수반되는 사회문화적 변화에 누가 잘 적응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생존이 갈라질 것이다. IT의 변화, 전문직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이준혁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학정책연구센터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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