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양키스는 4월 14일 뉴양키 스타디움에서 LA 에인절스와 홈 개막전을 가졌다. 선발투수는 구로다 히로키는 8이닝 5피안타 무실점에 탈삼진 6개를 곁들이며 상대 타선을 봉쇄했다. 양키스 타선은 5점을 뽑아내며 구로다의 어깨를 가볍게 했다. 8회까지 투구 수는 불과 104개. 구로다는 완봉을 노렸다. 9회 마운드에 올라 이내 선두타자 바비 어브레이유를 상대했다. 이전 타석에서 3타수 무안타에 머문 어브레이유는 볼카운트 2-2에 몰렸지만 출루에 성공했다. 허리가 빠진 상태에서 가까스로 바깥쪽 낮은 코스의 슬라이더(시속 134km)를 배트에 맞췄는데 타구가 내야잔디에 떨어진 뒤 바운드되지 않아 행운의 내야안타를 얻었다. 조 지라디 양키스 감독은 바로 마운드로 걸어 나가 구로다를 다독인 뒤 불펜의 데이비드 로버트슨을 호출했다. 로버트슨은 세 타자를 공 8개로 깔끔하게 돌려세웠다. 5-0 양키스의 영봉승. 구로다는 경기 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이런 기분을 시즌 내내 자주 느끼고 싶다”라고 승리 소감을 밝혔다. 선수단의 주장인 데릭 지터는 “구로다가 홈 개막전 선발투수라는 적잖은 심리적 압박을 이겨내고 완벽한 투구를 보여줬다”라고 칭찬했다. 이날 호투로 구로다는 양키스 최초의 동양인 홈 개막전 선발투수 및 승리투수가 되는 감격을 누렸다. 하지만 그의 조국 일본은 조용했다. 대다수 야구팬들은 여전히 스즈키 이치로(시애틀 매러너스)의 안타 여부와 다르빗슈 유(텍사스 레인저스)의 다음 선발등판 일정에만 관심을 보였다.
구로다는 미국 언론은 물론 메이저리그 관계자들로부터 “노모 히데오 이후 가장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일본인 투수”라는 찬사를 받는다. 이는 양키스의 홈 개막전 선발투수로 나선 사실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다. 뉴욕의 야구기자들은 외부 영입으로 핀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은 선수에게 냉혹한 잣대를 들이대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지라디 감독의 구로다 예고에 잡음은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탁월한 선택이라는 분석이 빗발쳤다. 그런데 이 같이 역사적인 날, 뉴양키 스타디움을 찾은 일본인 취재기자는 6명에 그쳤다. 반면 미네소타 트윈스의 홈구장인 타켓필드와 시애틀의 홈구장 세이프코 필드는 일본 매체 기자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당시 타겟필드에서는 다르빗슈의 소속팀인 텍사스가 원정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세이프코 필드에서는 스즈키를 비롯해 가와사키 무네노리, 이와쿠마 히사시 등이 경기를 준비하거나 뛰었다. 구로다는 조국에서 주목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6명의 기자 앞에서 서운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밝게 웃으며 “원래 인기가 없는 선수라서 괜찮다”라고 말했다.
‘빛과 그림자’ 동일본의 마쓰자카 서일본의 구로다
사실 구로다에게 언론의 외면은 그리 낯설지 않다. 실력으로만 따지면 일본 프로야구 시절부터 스타였던 까닭이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1시즌 동안 거둔 승리는 103번(89패 평균자책점 3.69). 74경기에서 완투를 뽐냈는데 이 가운데 14번은 완봉이었다. ‘미스터(Mr) 완투’라는 별명은 그래서 붙었다. 화려한 성적에도 인기를 얻지 못한 건 소속팀이 히로시마 카프였다는 점에 있다. 히로시마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유일하게 시민구단 형태로 운영된다. 세 차례 저팬시리즈 우승트로피(1979년, 1980년, 1984년)를 차지하는 영광의 시대도 있었지만 B클래스(리그 4~6위)에 머물 때가 더 많았다. 그 횟수는 지난 시즌까지 무려 41차례에 이른다.
1975년생인 구로다는 5살이 어리지만 활동시기가 겹친 마쓰자카 다이스케(보스턴 레드삭스)와 자주 비교됐다. 둘에게는 공통점이 많았다. 타자를 윽박지르는 빠른 공, 다양한 변화구, 완투를 밥 먹듯이 해내는 탄탄한 체력 등이다. 그래서 일본 매체들은 재빠르게 라이벌 분위기를 조성했다. ‘동일본의 마쓰자카, 서일본의 구로다’와 같은 형태였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는 고르게 돌아가지 않았다. 언제나 마쓰자카의 몫이었다.
차이는 한 가지 더 발견된다. 구로다는 마쓰자카와 달리 엘리트 코스를 밟지 못했다. 아버지인 구로다 가즈히로는 프로야구 선수였다. 1949년부터 1956년까지 8년 동안 난카이 호크스(1949~53), 다카하시 톰보우즈(1954~55), 다이에 유니온즈(1956) 등에서 뛰었다. 그는 배트 성적(타율 .246)은 저조했지만 빠른 발과 넓은 수비범위를 자랑했다. 주 포지션은 중견수였지만 유격수를 제외한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했을 만큼 수비 솜씨를 인정받았다. 가즈히로는 난카이가 퍼시픽리그 3연패를 차지한 1951~53시즌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선수단은 이어진 저팬시리즈에서 매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발목이 잡혀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뼈아픈 기억은 그를 ‘안티 요미우리’로 만들기 충분했다.
현역 은퇴 뒤 오사카에서 야구용품점 ‘구로다 스포츠’를 운영한 가즈히로는 스미노에 보이스리그(일본의 유소년 클럽야구리그로 리틀(초등부)과 리틀 시니어(중등부)로 나뉜다) 구단, ‘올(All) 스미노에’를 창단하고 직접 감독을 겸했다. 구로다의 야구인생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됐다. 아버지는 가장 운동신경이 좋은 차남 구로다에게 야구공을 쥐어줬다. 가즈히로는 아들이 큰 선수로 성장하려면 재능 발굴과 조기 교육이 동시에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라운드에서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했고 몇 달 뒤 수비의 기본기는 훌륭하나 타격에 재능이 없다고 단정을 내렸다. 그가 대신 주목한 건 어깨였다.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강하고 부드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로다는 마른 체격 탓에 좀처럼 날카로운 구위를 뽐내지 못했다. 우에노미야 고교 시절 에이스 경쟁에서도 보기 좋게 밀려났다. 가즈히로는 아들의 더딘 성장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구로다를 고향인 오사카가 아닌 도쿄 센슈대학에 진학시키며 끝까지 야구공을 놓지 않게 했다. 센슈대학에 보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학교는 엘리트 선수들이 대거 진학하는 도쿄 6대학리그가 아닌 도토 대학리그 소속이었다. 팀 내 주전경쟁은 다른 대학에 비해 덜 치열했다. 또 다른 이유는 도토 대학리그가 열리는 장소에 있다. 도쿄 도심에 위치한 진구구장에서 치러져 일본 프로구단 스카우트들의 눈에 자주 비춰질 수 있었다.
아버지의 치밀한 계산이 통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로다는 1학년이던 1993년 직구 최고 구속 150km를 찍었다. 진구구장에 스피드건이 설치된 이래 대학생 첫 번째 기록. 스카우트들의 시선이 쏠린 건 당연했다. 구로다는 빈약한 팀 전력으로 대학 4년 동안 6승 4패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히로시마 구단은 1996년 신인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망설임 없이 구로다의 이름을 호명했다.
‘롤러코스터’ 피칭 버리다
히로시마는 구로다에게 바로 선발투수 수업을 제공했다. 구단의 배려에 그는 빠르게 화답했다. 1997년 4월 25일 요미우리와의 도쿄돔 원정경기에 선발 등판, 9이닝 완투 쇼(1실점)를 펼치며 승리를 챙겼다. 히로시마 유니폼을 입고 프로 데뷔전에서 승리를 거둔 다섯 번째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었다. 데뷔전 완투승으로는 구단 역사상 네 번째였다. 앞서 스기우라 유타로(1951년), 오오타카 기요시(1952년), 사사오카 신지(1990년) 등이 비슷한 절차를 밟으며 화려한 데뷔를 알렸다. 하지만 구로다는 입단 이후 4년 동안 ‘롤러코스터’ 피칭의 대명사로 통했다. 한 경기를 잘 막으면 다음 경기에서 볼넷을 남발하며 무너졌다. 제구 향상을 위해 그는 팀의 에이스 사사오카 신지를 스승처럼 떠받들었다.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더 큰 투수로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투구에 크게 자신감이 붙은 건 1999년 출전한 대륙간컵대회에서였다. 일본대표로 선발된 그는 11월 5일 한국과의 경기에서 김원섭(KIA), 박한이, 신명철(이상 삼성) 등이 버틴 타선을 8이닝 2실점으로 틀어막았다. 이어진 대만전에서는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의 맹활약 덕에 일본은 대회 3위를 차지했다. 이후 투구는 거듭 상승곡선을 그렸다. 이듬해 9승 6패 116탈삼진을 기록하며 이름 앞에 붙었던 ‘유망주’ 수식어를 지웠고 2001년 27번의 선발 등판에서 13경기를 완투로 장식하는 괴력을 뽐냈다. 그해 성적은 12승 8패 평균자책점 3.03이었다. 승승장구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2001년 12승, 2002년 10승, 2003년 13승)를 챙기는 등 히로시마의 간판으로 거듭났다.
시속 160km보다 중요했던 세 가지
구로다는 2003년 겨울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시속 160km 이상의 구속이었다. 결과적으로 도전은 독이 됐다. 이듬해 직구 평균 구속은 3~5km가량 빨라졌지만 고질병이었던 제구 불안 재발로 7승 9패 평균자책점 4.65를 남기는데 그쳤다. 불리한 볼카운트에서도 한가운데로 직구를 던져 볼넷을 29개밖에 내주지 않은 것이 그나마 희망적이었다. 소득은 하나 더 있었다. 애초 목적이었던 구속 증가다. 2004년 6월 20일 구로다는 자신의 최고 구속을 157km로 바꿔놓았다. 그해 아테네올림픽 야구 본선에서는 160km를 수차례 찍었다. 스피드건 오작동 논란이 있었지만 그의 공을 받았던 포수 조지마 겐지(한신 타이거즈)는 “160km로 찍힌 구속을 의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구속을 올렸지만 제구에 어려움을 겪은 구로다는 2005년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투구 폼 전면 개조였다. 프로 9년차에 30대에 진입한 그의 선택은 사실상 모험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만류에도 구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바로 재능에 비해 부진한 성적을 남기는 이유를 세 가지로 자가 진단했다. 와인드업 포함 투구 진행과정에서 몸의 중심이 흔들린다는 점, 직구와 변화구를 던질 때 노출되는 미세한 투구 폼의 차이, 공 끝 움직임 및 낮은 제구로의 보완 등이다. 이를 통해 얻어내려 했던 궁극적은 소득은 장타 억제였다. 구로다는 히로시마에서 74차례나 완투를 뽐냈지만 완봉이 14번에 그쳤다. 이는 홈구장인 히로시마 시민구장의 특성 탓이 컸다. 좌우펜스가 91m, 센터펜스가 115m밖에 되지 않아 2루타성 장타가 빈번하게 홈런으로 연결됐다. 구로다는 일본에서 뛴 11년 동안 총 182개의 홈런을 얻어맞았다. 해결방법으로 그는 빠른 구속을 지양했다. 대신 공을 낮게 던져 내야 땅볼로 아웃카운트를 늘리는데 주력했다. 물론 이를 통해 볼넷의 감소도 함께 노렸다.
투구 밸런스와 폼을 유지하는데 기울인 노력의 결과는 놀라웠다. 구로다는 2003년(205.2이닝) 이후 2년 만에 200이닝 이상(212.2이닝)을 소화했다. 평균자책점도 다시 3점대(3.17)로 내렸다. 생애 첫 15승(12패)은 덤. 자유계약선수(FA)를 앞둔 2006년에도 비상은 계속됐다. 구로다는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국가대표로 선발됐지만 대회를 앞두고 치른 연습경기에서 타구에 오른손을 맞아 전력에서 제외됐다. 이 때문에 남들보다 더 치밀하게 시즌을 준비할 수 있었다. 경기를 치를수록 구위는 매서워졌다. 가장 빛을 발휘한 건 여름이었다. 구로다는 7월 한 달 동안 4승 무패 평균자책점 0.84로 호투하며 팀 동료 쿠리하라 겐타와 함께 센트럴리그 월간 MVP를 수상했다. 8월에도 얼굴은 바닥을 향하지 않았다. 4승 무패 평균자책점 1.11을 기록하며 2달 연속 월간 MVP에 뽑히는 기쁨을 누렸다. 히로시마 구단 역사상 처음 벌어진 경사였다. 당시 그는 “히로시마 역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돼 기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구로다는 9월 팔꿈치 이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다. 정밀검진을 통해 밝혀진 원인은 오른 팔꿈치인대 뼛조각. 한 달 반가량을 재활에 매진해야 했다. 10월 16일 그는 주니치 드래건즈와의 시즌최종전에서 마무리로 복귀해 세이브를 올렸다. 시즌 최종 성적은 13승 6패 평균자책점 1.85. 시즌 막판 부상을 당했지만 1992년 아카보리 모토유키(긴데쓰 버팔로스, 현 오릭스 투수코치)의 1.80 이후 14년 만에 1점대 평균자책점을 선보였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구로다는 2010년 SK에서 2군 투수코치를 지냈던 아카보리를 앞선다. 아카보리가 출전한 50경기 가운데 48번은 구원 등판이었다. 이닝도 규정인 130이닝만을 채웠다. 선발투수로만 따지면 1점대 평균자책점은 17년만의 기록이다. 앞선 주인공은 1989년 사이토 마사키로 1.69였다.
아버지에게 전한 마지막 선물
일본 프로야구는 1993년부터 FA제도를 도입했다. 그런데 히로시마는 2005년까지 한 번도 FA 선수를 잡지 못했다. 현지 매체들은 구로다의 행선지를 두고 미국 메이저리그 5개 구단, 일본 3개 구단(요미우리, 한신, 소프트뱅크) 등의 이름을 거론했다. 히로시마 잔류 가능성은 0%로 내다봤다. 이에 팬들은 10월 16일 히로시마 시민구장 외야석에 삼삼오오 모여 대형 플랜카드를 내걸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함께 싸워 온 지금까지도, 앞으로 빛날 그 날까지도, 그대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대의 눈물이 되어 준다. 히로시마 카프 에이스 구로다 히로키.’
구단 측은 하루 전인 15일 구로다를 만나 4년 10억 엔(약 144억 원)에 차기 감독 보장을 약속했다. 하지만 잔류 설득은 그의 발목을 붙잡기에 역부족해 보였다. 요미우리 등 다른 일본 구단들이 최소 4년 20억 엔(약 287억 원)의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던 까닭이다. 메이저리그에 진출 시 몸값은 4년 4000만 달러(약 459억 원)로 예상되기도 했다. 거듭된 난항에 히로시마 구단은 “FA제도가 도입된 이후 10억 엔을 제시한 건 구로다가 구단 역사상 처음이다”라며 자신들의 성의를 애써 강조했다. 이 같은 협상 태도에 팬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이내 구단의 소극적인 태도를 일제히 비난했다. 차기 감독 보장 옵션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0년 입단해 17년째 히로시마 유니폼을 입고 입던 마에다 도모노리가 버티고 있어 언제 사령탑에 앉게 될지 기약할 수 없었다. 구단의 달콤한 립 서비스에 가까웠던 셈. 더구나 마에다는 구로다보다 4살이 더 많다. 선수단 내 정치적 영향력에서도 이겨낼 자가 없었다.
그런데 구로다는 의외의 선택을 내렸다. FA 신청 없이 11월 6일 히로시마와 4년 12억 엔(약 172억 원) 조건에 잔류 계약을 맺었다. 단 계약서에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경우 언제든지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라는 옵션이 붙었다. 구로다가 잔류를 택한 건 아버지의 병환 때문이었다. 가즈히로는 아들이 요미우리를 제외한 다른 구단의 유니폼을 입는 것을 만류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로다는 부자관계 이상이었던 아버지를 두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없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그는 바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가 오른 팔꿈치뼛조각 제거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2007년의 목표를 200이닝으로 설정했다.
구로다는 그해 7월 14일 요미우리를 상대로 일본프로야구 통산 100승을 거뒀다. 도쿄돔 원정경기에서 9이닝을 6피안타 1볼넷 7탈삼진 2실점(2자책)으로 막아내며 완봉승을 기록했다. 이는 병마와 싸우던 아버지에게 전하는 마지막 선물이 됐다. 가즈히로는 한 달여 뒤인 8월 17일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의 이별 뒤 구로다는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동계훈련 부족으로 인한 체력 저하까지 더 해지며 8월과 9월을 엉망으로 보냈다. 최종 성적은 12승 8패 평균자책점 3.56. 그러나 시즌 최다인 24개의 홈런을 얻어맞았고 179.2이닝으로 목표였던 200이닝도 끝내 채우지 못했다.
일본인 선발투수 3년 한계론 뛰어넘다
구로다가 히로시마 잔류를 선언한 2006년 겨울 마쓰자카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5111만 달러(약 589억원) 포스팅 공세에 힘입어 메이저리그에 입성했다. 일본 선수들에 대한 거품은 이듬해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덕에 구로다는 33살의 적잖은 나이에도 미국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을 수 있었다. 그를 눈여겨본 구단은 무려 10곳. 시애틀 매리너스, LA 다저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뉴욕 양키스, 뉴욕 메츠, 보스턴 레드삭스, 시카고 컵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심지어 캔자스시티 로열스마저 영입 경쟁에 가세했다. 존 다니엘스 텍사스 레인저스 단장은 직접 구로다의 이름을 언급하며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치열했던 경쟁 구도는 이후 시애틀과 다저스의 싸움으로 좁혀졌다. 시애틀의 계약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무려 4년 4400만 달러(약 505억 원)를 제시했다. 3년을 제안한 다저스를 훌쩍 넘었다. 하지만 구로다는 다저스를 선택했다. 이유를 묻는 미국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LA는 날씨가 따뜻하고 일본인들이 생활하기 좋은 도시다. 오른 팔꿈치뼛조각 제거수술을 위해 찾았을 때부터 좋은 인상을 받았다. 다저스가 (시애틀보다) 우승 가능성도 더 높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메이저리그에서 일본인 선발투수 영입 때 가장 우려하는 건 비교적 짧은 유통기한이다. 그간 노모 히데오, 오카 도모카즈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은 1년차 때 좋은 활약을 보이다 2년차 때부터 하락세를 그렸다. 굳이 성적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비관적인 예감을 지닌 위험징후를 노출했다. 3년차 때부터 경쟁력을 잃는 투수는 너무나 쉽게 발견될 정도다. 그래서 적잖은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은 다저스 유니폼을 입게 된 구로다의 활약에 의문을 제기했다. 마쓰자카 못지않은 기량에는 동의하면서도 3년 계약이 만료되는 35살까지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구로다는 예상대로 메이저리그 진출 첫 해인 2008시즌 승승장구했다. 그해 4월 4일 다저스타디움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는데 7이닝 4피안타 1실점을 기록하며 승리를 챙겼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6월 6일 시카고 컵스 타선을 4피안타 무사사구 11탈삼진으로 틀어막으며 메이저리그 진출 첫 완봉승을 올렸다. 하지만 가장 주목을 받은 건 7월 7일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전. 7회까지 21명의 타자를 퍼펙트로 돌려세웠다. 8회 선두타자 마크 텍세이라에게 우익선상 2루타를 내줘 퍼펙트는 깨졌지만 1안타 완봉승을 거두며 자신의 이름을 미국 전역에 알렸다. 다저스에서 신인투수가 7회까지 퍼펙트를 기록한 건 1984년 오렐 허샤이저 이후 두 번째였다. 잇단 호투에도 구로다의 정규시즌 승수는 9승(10패)에 머물렀다. 타선의 빈약한 득점 지원 탓이 컸다. 하지만 31차례 선발 등판에서 퀄리티스타트만 19번을 기록해 평균자책점만큼은 3점대(3.73)를 기록할 수 있었다.
다저스 구단이 구로다의 투구에 만족감을 보인 건 당연했다. 가장 흡족해한 건 떨어지지 않는 직구 구속. 구로다는 8월 이후 스피드를 내는데 어려움을 겪는 많은 동양인 선발투수들과 달리 한여름인 7월 이후에도 148km의 직구 평균 구속을 유지했다. 물론 단점도 체크했다. 직구 제구가 낮게 유지되지 않는 경기에서의 많은 실점이다. 직구 제구 여부에 따라 투구 내용은 크게 바뀌었다. 이에 조 토레 당시 다저스 감독은 “어느 모습이 진짜 구로다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구로다는 고민하던 토레 감독의 마음을 금세 사로잡았다. 그해 10월 5일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시카고 컵스와의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 3차전에 선발투수로 등판해 6.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승리를 챙겼다. 8일 뒤 같은 장소에서 펼쳐진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3차전에서도 6이닝 2실점 호투로 팀에 승리를 안겼다.
승리 소식은 2009시즌에도 이어졌다. 구로다는 일본인 투수로는 노모 히데오(2003년 LA 다저스), 마쓰자카 다이스케(2008년, 보스턴 레드삭스)에 이어 세 번째로 개막전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4월 6일 펼쳐진 샌디에이고 에이스 제이크 피비와의 맞대결에서 그는 5.1이닝을 1실점으로 틀어막으며 2003년 노모 이후 개막전에서 승리를 챙긴 두 번째 일본인 투수로 거듭났다. 하지만 경기 직후 구로다는 옆구리 부상을 입었고 결국 전반기를 3승 5패 평균자책점 4.67로 마감했다. 악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후반기 복귀해 이전 구위를 재현했지만 8월 16일 애리조나와의 홈경기에서 러스티 라이얼의 강습 타구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머리 오른쪽을 강타한 공은 3루 더그아웃 대기타석까지 날아간 뒤 관중석으로 들어갔다. 멀리 튄 타구 덕에 그는 겨우 두개골 골절을 면할 수 있었다. 경기 뒤 구로다는 자신의 부상보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라이얼을 걱정했다.
“타구에 맞는 것도 경기의 일부다. 라이얼에게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슈퍼스타가 되어 오늘 일을 웃으며 회상할 수 있길 기대한다.”
구로다는 한 차례 마이너리그 시험등판을 거친 뒤 21일 만인 9월 6일 메이저리그에 복귀했다. 샌디에이고와의 홈경기에서 그는 5이닝 동안 4실점(3자책)을 기록했다. 하지만 6일 뒤 AT&T 파크에서 열린 샌프란시스코와의 원정경기에서 8이닝 3피안타 무사사구 5탈삼진 2실점을 기록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경기를 지켜본 스탠 콘티 다저스 수석 트레이너는 혀를 내둘렀다.
“구로다는 여전히 두통을 호소하고 불면증에 시달린다. 잠을 자면서도 사고 당시 순간이 계속 반복되는 악몽을 꾼다. 그래서 신기하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컨디션이 모두 엉망인데 마운드에만 서면 전사(Warrior)로 돌변한다.”
전반기 옆구리 부상과 후반기 머리 부상으로 2009시즌 구로다는 117.1이닝을 소화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후반기 5승 2패 평균자책점 2.98을 기록하며 2년차 징크스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단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은 미미했다. 10월 3일 경추 통증 호소로 부상자명단에 올랐고 10월 19일 필라델피아와의 내셔널리그챔피언십 3차전에 선발 등판했지만 1.1이닝 6실점으로 조기 강판됐다.
구로다는 오프시즌 동안 부상 치료에 전념했다. 그 덕에 2010시즌 위력적인 투구를 뽐낼 수 있었다. 5월 13일 애리조나전에서 그는 시즌 4승째를 올렸다. 미국 진출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승수를 쌓아나갔다. 하지만 이후 다저스 타선은 호투를 뒷받침하지 못했고 결국 전반기 승수는 5승으로 매듭지어졌다. 구로다는 ‘여름의 사나이’답게 후반기 더 힘을 발휘했다. 14번의 선발 등판에서 13차례 6이닝 이상을 책임졌다. 8월 13일 터너필드에서 열린 애틀랜타와의 원정경기에선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최고인 시속 158km도 찍었다. 평균자책점 2.87을 기록한 후반기 호투에 힘입어 그는 시즌을 11승 13패 평균자책점 3.39의 준수한 성적으로 마감했다.
우승 꿈꾸는 미숙한 비즈니스맨
다저스와의 3년 계약이 만료된 구로다는 많은 메이저리그 구단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그는 히로시마 복귀를 희망했다. 11년 동안 자신을 응원해 준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히로시마와의 협상은 진척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구단에서 제시한 조건이 1년 3억 엔(약 43억 원)에 그쳤던 까닭이다. 친정팀에 서운함을 느낀 구로다는 이내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가족들을 LA로 불러들였다. 이어 “다저스에 남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1년 계약을 맺을 구단을 수소문했다. 일반적으로 30대 선수들은 FA 협상 테이블에서 다년 조건을 내건다. 하지만 구로다는 끝까지 1년 계약 입장을 고수했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앞 다퉈 달려든 건 불 보듯 뻔했다. 뉴욕 양키스, 보스턴 등은 2년 계약까지 제시했다. 특히 보스턴의 움직임은 적극적이었다. 구로다는 보스턴이 2010시즌 중반 추진했던 트레이드가 양 구단 간 합의까지 넘어가자 트레이드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다.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던 셈이다. 결국 구로다는 1년 1200만 달러(약 138억 원) 조건에 다저스와 재계약을 체결했다.
지난 시즌 투구에는 원숙함이 더 해졌다. 앞선 3년간의 전반기 경기에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평균자책점 3.08을 기록하며 달라진 모습을 선보였다. 승수 차이는 크지 않았다. 맷 켐프 홀로 분전하는 타선은 구로다에게 6승밖에 안겨주지 못했다. 오히려 구로다는 10패라는 부담을 떠안았다. 패한 경기 가운데 6경기는 퀄리티스타트였다. 어깨를 축 쳐지게 만든 건 빈약한 타선에 그치지 않았다. 다저스는 프랭크 맥코트 구단주가 전 부인 제이미와의 이혼,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중계권 계약 승인 거부 등으로 재정난에 몰리자 이내 구로다의 트레이드를 추진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은 영입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구로다는 트레이드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거듭 강조했다. 어지러운 형국에도 불구 그는 메이저 진출 이후 최다승인 13승(16패)을 따냈다. 3.07의 평균자책점과 소화해낸 202이닝 역시 커리어하이였다. 메이저리그에서 뛴 역대 동양인 투수 가운데 36살의 나이에 200이닝을 넘긴 건 구로다가 최초였다.
이어진 오프시즌 행보는 2010시즌 뒤와 흡사했다. 히로시마 복귀를 타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고 또 한 번 다저스를 향한 애정을 고백했다. 네트 콜레티 다저스 단장은 구애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차가운 반응으로는 구로다도 뒤지지 않았다. 케빈 타워스 애리조나 단장의 1년 1400만 달러(약 161억 원)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새로운 팀을 찾는데 결국 해를 넘긴 구로다는 1월 14일 뉴욕 양키스와 1년 1000만 달러(약 115억 원)에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애리조나보다 부실한 조건에도 동의를 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말한다.
“얼마 남지 않은 선수생활에서 우승을 경험하고 싶었다. 양키스는 충분히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는 팀이라고 생각했다. 핀 스트라이프 유니폼에 대한 동경도 조금 있었다.”
메이저리그 적응, 패스트볼 경쟁력이 관건
37살의 구로다에게 양키스 적응은 쉽지 않은 문제다. 장애물은 크게 4가지로 나뉜다. 리그 이동에 따른 적응, 타자에게 유리한 양키스타디움, 최고수준 타자들이 집결해 있는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2선발 중책에 대한 부담 등이다. 하지만 구로다는 마운드 운영은 순항을 거듭하고 있다. 17일 현재 3승 4패 평균자책점 3.56을 기록하고 있다. 7번의 선발 등판에서 4차례나 퀄리티스타트를 뽐냈다. 현 흐름대로라면 지난 시즌 20번을 넘어설 수 있다는 평이다. 동양인 투수 가운데 한 시즌 가장 많은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한 건 2001년 다저스에서 뛴 박찬호(한화)로 25회였다.
5년째 메이저리그에서 승승장구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많은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은 직구의 높은 경쟁력, 공을 낮게 스트라이크 존에 넣을 수 있는 제구력과 자신감, 시즌 내내 일정한 구위를 유지하는 철저한 몸 관리 등을 손꼽는다. 대다수 일본인 선발투수들의 직구 비율은 40%대에 머문다. 주로 직구로 유리한 볼카운트를 이끌어낸 뒤 다양한 변화구로 타자들의 방망이를 유혹한다. 60%대에 육박하는 변화구 비율은 투 스트라이크 이후 변화구로 승부를 거는 일본 프로야구 특유 패턴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직구에 대한 경쟁력이 떨어져 자신감을 잃는데서 기인하는 경우가 더 많다. 구로다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는 대표적인 파워피처다. 메이저리그에서 뛴 5년 동안 직구(포심패스트볼, 투심패스트볼, 컷패스트볼, 싱커) 비율은 매 시즌 60%대를 상회한다.
직구의 비중이 높은 건 평균 구속이 매 시즌 시속 148km를 유지하는 까닭이다. 7경기를 뛴 올 시즌은 146.2km다. 구속이 7월 이후 올라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심각한 저하라고 보기 어렵다. 빠른 직구는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잡는 적극적인 피칭을 가능하게 해준다. 구로다의 지난 5년간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은 59.9%였다. 그의 직구는 꽤 지저분한 움직임을 자랑한다. 타자들의 헛스윙을 많이 유도해내는 셈이다. 일부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은 투수 구종의 위력을 체크하는 지표로 헛스윙율을 사용한다. 수치는 10%를 넘기면 리그 상위권의 구종으로 분류된다. 구로다의 지난 5년간 평균 헛스윙율은 9.8%로 10%에 육박한다. 2년 연속 평균자책점 3.50 이하를 기록한 2010년과 지난해는 각각 10.7%와 10.3%였다.
구로다에게도 약점은 있다. 왼손타자와의 승부가 대표적이다. 구로다는 오른손타자 상대 시 투심패스트볼을 타자의 무릎근처에 붙이며 기선을 제압한다. 바깥쪽으로는 스플리터(평균 140km), 슬라이더(평균 135km), 커브(평균 127km) 등을 던져 헛스윙을 유도한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는 승부구로 주로 싱커(평균 148km)를 던진다. 볼 배합은 왼손타자 상대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구로다는 포심패스트볼을 왼손타자 무릎 근처에 붙이는데 다소 애를 먹는다. 지난 5년 동안 오른손과 왼손 타자 상대 피안타율은 각각 0.236과 0.256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피장타율은 다르다. 오른손 타자에게 0.348이었던 반면 왼손타자에게 0.417이다. 오른손 타자에게 허용한 안타 353개 가운데 장타는 91개였다. 하지만 왼손타자에게는 358개의 안타를 내주며 132개의 장타를 얻어맞았다. 지난 시즌 아쉽게 2점대 평균자책점 진입을 놓친 것 역시 왼손타자 공략에 대한 어려움 때문이었다. 피장타율은 0.451이었다. 이 같은 양상은 올 시즌도 다르지 않다. 구로다는 오른손타자들을 피안타율 0.162 피OPS 0.499로 잘 막아내고 있다. 하지만 왼손타자들을 상대로 피안타율 0.348 피OPS 0.955의 부진을 겪고 있다. 이 같은 약점은 장기화될 경우 충분히 남은 선수생명을 갉아먹을 수 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구로다는 지난 3월 일본 TV 프로그램에 출연, 37살의 나이에도 구위를 유지하는 비법을 공개했다. 직접 밝힌 원동력은 꾸준한 체중관리와 선발 등판 전의 충분한 휴식 및 체력 안배였다. 이를 설명하며 그는 2007년 메이저리그 진출 뒤 체중이 급격히 불어난 마쓰자카를 향해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는 건 체력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많은 투수들이 체중이 불어나면 공을 던질 때 스태미나가 좋아진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투구밸런스에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체중을 파악하고 이를 시즌 내내 관리하는 것이 좋다.”
구로다는 히로시마 시절 선보인 여덟 가지 구종 가운데 직구, 스플리터, 슬라이더 정도만 던지는 투수로 변신한 이유에 대해서도 함께 밝혔다. 애써 노린 건 구종의 경쟁력 상승과 체력 유지였다.
“자신 없는 구종을 던지면 그만큼 실투가 나올 확률은 높아진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그런 실투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몇 가지 구종 위주로 승부를 해야만 자신의 페이스대로 경기를 끌고나갈 수 있다. 불펜 투구를 크게 줄인 것도 비슷한 차원에서다.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만 해도 일본에서처럼 불펜 피칭을 많이 소화했다. 그러나 이내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을 느끼게 됐고 릭 허니컷 투수코치와의 상의 끝에 불펜 투구 수를 줄이자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을 찾은 이상 미국식 야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일본에서 해왔던 방식을 고수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을 리그에 맞추는 건 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나는 야구를 하기 위해 미국을 찾은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야구를 하고 싶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컨디션 조절이나 트레이닝 방법 등을 받아들이려는 시도 등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11년 동안 하루에 6시간을 자던 사람이 4시간만 자고 활동한다고 생각해보자. 이건 적응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미국 방식에 따라가기 위해 이를 악물고 참으며 이겨내는 과정에 가깝다.”
구로다는 마쓰자카, 다르빗슈와 같이 타고난 재능에 노력을 더해 경력을 쌓은 선수가 아니다.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매년 자신의 기량을 끌어올린 선수에 더 어울린다. 메이저리그에서 얼마나 더 뛸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쉬움은 누구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 뒤늦게 메이저리그에 진출했고 타선의 침묵 등으로 많은 승수도 쌓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30대 후반의 나이에 매 시즌 200이닝 가량을 소화하며 20차례가 넘는 퀄리티스타트를 선보인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에 빛나는 박찬호도 123승을 올린 노모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구로다는 그렇게 전설적인 동양인 메이저리거로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김성훈 해외야구 통신원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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