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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공광규 '놀란 강, 아니고' 중에서

시계아이콘읽는 시간29초

강물은 몸에/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모래밭은 몸에/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새들은 지문 위에/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꾹꾹 찍고 돌아오는데/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그걸 어쩌겠다고?/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파랗게 질린 강/아니고, 지금은 피 흘리는 강.


■ 4대강을 파헤치던 삽차를 막아선 건 머리띠 두른 배추농부나 환경운동가들만이 아니다. 시인들도 강이 시(詩)를 흐르게 하는 근원임을 알고 있기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설검(舌劍)을 휘두르는 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강이 진정 무엇인지를 말하는 이런 시도 있다. 탁본, 낙관, 화선지, 비단, 거울, 원고지인 강은 그대로 예술의 원본이자 예술행위의 내부이다. 그 강을 뒤엎으니, 푸른 강이 파랗게 질린 정도가 아니라, 그 붉은 바닥이 드러나 피를 흘리는 지경이 되었다는 고발이다. 점잖지만 할 말은 다하고 있는 시이다. 이 시를 읽노라니, 당나라 기생시인 설도의 '해당계(海棠溪)'가 떠오른다. 봄꽃이 물에 비쳐 물고기가 마치 꽃을 두른 것 같다. 아, 참 곱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도 모르고 봄놀이한답시고 붉은 비단옷을 입고나와, 저 미묘한 빛깔을 망치고 있다고, 설도는 슬퍼했다. 강을 제발 그냥 놔두게, 이 사람들아.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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