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김춘옥 ‘자연-관계성’ 연작
사랑도 처음엔 싹이 트듯 꽃봉오리 맺혔네. 밤새 촉촉이 젖은 오므린 연잎을 펴니 또르르 구르는 해맑은 표정의 물방울들…. 살다가 문득 너 보다 미리, 떠올릴 것이다!
봄비 지나간 연못가. 비릿한 물 냄새 잔바람 따라 오간다. 솜털 같은 물안개 피어올랐던 자리, 아담한 노랑꽃술 마름꽃이 반듯이 누워 도도하게 햇살을 기다린다. 보는 이 하나 없는데 하얀 꽃은 하나 둘 톡톡 불거져 안타까운 물이 졸음에 겨운지 뒤척이자 잔잔한 파동이 인다. 그러나 이 연약한 꽃의 자신감 뒤 녹아든 고독의 시간이 있었기에 어스레히 동이 터오는 것임을.
투명한 물결엔 큰 키의 꽃대와 한 그루 목련과 누군가 심어놓은 모란꽃 무리들이 아른거리다 엉키다 흩어지곤 했다. 주름진 커다란 타원형 연잎아래 어린 물고기들이 떼 지어 한바탕 개구쟁이 짓으로 나른한 정적을 깼다. 그러면 광선(光線)은 마치 춤추듯 여러 갈래 직선의 빛줄기로 이곳저곳을 스치며 물속깊이 잠긴 시간의 얼룩을 비추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쉬지 않을 곳에서 머무는 것을 우연이라 했던가. 빛은 ‘오늘은 말하리라’던 파릇한 설렘의 속살을 빤히 쳐다보곤 재빠르게 지나갔다. 그때 뭔가 속내를 들킨 것처럼 괜스레 흠칫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임 만나 물 사이 연밥을 던지다가 남의 눈에 그만 띄니 반나절이나 무안해라”던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채연곡(采蓮曲) 마음도 이러했을까. 어느새 호젓한 물가엔 고개를 내민 새싹들이 소복하다. 쌀알 같은 하얀 햇살은 눈부신 물속을 종소리처럼 퍼져나간다. 그 하나하나의 낟알들은 간절한 기도의 밀알처럼 어느 날엔 반드시 부끄러움 없는 생(生)의 발자취로 이끌 것임을 믿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뭐라 깔깔대며 수직으로 오르내리며 경탄스럽게 몸을 놀리는 한 무리 텃새들이 지나간다. 한갓 미물로 태어나 언제나 더 높은 하늘을 나는 꿈을 키우고 해충을 잡아 제 몫에 한 치 흔들림 없는 새여, 생명 그 아름다운 공존의 풍경이여!
일체가 마음이면 물속처럼 투명할까. 이 영롱한 은유에서 길어 올린 순수한 물의 결정은 또 얼마나 깊고 찬란한가. 느릿느릿 아직도 상처를 감도는 생각의 아우성 위로 정갈한 한줄기 물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 뿐이었는데, 덧난 촉각은 가라앉고 그 질펀한 바닥서 꽃송이 피어올랐다. 근원을 다스려 준 마음의 거울. 오늘도 생성되는 호수 아래 샘물의 흐름. 반갑고 감격스럽다. 널 얼마나 찾았는데….
이코노믹 리뷰 권동철 기자 k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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