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조향숙 ‘TO FIND LOST TIME’ 연작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런가. 진흙에 피어나는 연꽃처럼 청정한 향기의 참다운 나를 만났으면…. 금조우풍기(今朝又風起), ‘오늘 아침 또 바람이 일어났다!’<조주 선사>
마침내 허무의 골짜기를 솟아올랐다. 광활한 산맥은 음음한 풍운(風雲)에 아랑곳없이, 침묵했다. 그 우렁찬 울림의 광야에 천리무(千里霧)가 하나로 통하는 원융(圓融)으로 다소곳이 안겼다. 여인이 살포시 내딛는 한걸음 치맛자락처럼, 모였다 흩어지며 숨죽인 물너울 같이, 부드럽게 더듬듯 안개는 봉우리를 기어오르다 몇 걸음 앞서 낭객(浪客)처럼 사라지곤 했다.
그때 얼음장 같이 차가운 한 오라기 바람이 예상치 못한 방황처럼 휘이익 날카롭게 지나갔다. 늘어진 실버들이 크게 한번 출렁이는 듯한 찰나, 아득한 새벽 안개 사이 억겁(億劫)의 시간이 치자(梔子)를 우려낸 듯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꽃 사이로 사라져 가는 무지개 속에서 가쁜 호흡이 육중하게 밀려왔다. 일순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천개의 손과 눈처럼 지축을 흔들 듯 정적의 허공 속을 말(馬)들이 창연한 마음으로 단숨에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영원히 잊지 못할 이름을 부르듯 팔을 벌려 벅찬 가슴을 활짝 열었다. 말 등엔 맨발의 석가여래(釋迦如來)처럼 반라(半裸)의 보송보송 순수한 살빛이 감격의 흥분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좁고 어두운 마구간, 웅크린 탐욕의 껍질을 벗기까지의 오랜 기다림. 어서 오라, 오직 일념의 꿈을 향해 쟁쟁히 질주해 온 너를 기꺼이 맞을 것이다.
얼마나 마음껏 우주를 달리고 싶었었느냐. 동트는 아침, 내뿜는 뜨거운 입김으로 고결한 함박꽃송이들이 지천으로 뿌려지고 있었다. “화엄! 그것은 꽃의 세계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화엄! 그것은 진리의 세계다. 얼마나 치열한가.”<고은 소설, 화엄경>
타인을 긍정해서 자아를 비우는 삶의 행로
이윽고 점점이 맑아지는 시계(視界)…. 산마루 너머 청람(淸覽)한 빛깔의 바다가 찬연히 펼쳐졌다. 합일(合一)의 잔물결엔 돛단배 하나 유유히 떠가고 다시 일상은 반복처럼 왔다. 언덕 위 초막, 작은 부처만이 꼼짝 않고 종일 앉아 있을 뿐 종종 말을 달리듯 세속을 밀어내듯 뿌리 없는 기억은 미풍처럼 일다 돌풍처럼 사라져갔다.
현묘(玄妙)한 정취를 자아내는 새는 과거와 현재, 현실과 비현실을 오갔다. 바위를 휘돌아 물살에 휩쓸려가는 딱딱한 편견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기왕 내 속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과 또한 “타인을 긍정해서 자아를 비우는 유마경(維摩經)”<황동규 시집 ‘꽃의 고요’>을 부지런히 퍼 날랐다.
이코노믹 리뷰 권동철 기자 k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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