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 17회 SBS 수-목 밤 9시 55분
이방지(우현)는 백성이 임금에게 복수를 꿈꿀 수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 했기에, 강채윤(장혁)이 노린 것이 세종(한석규)이라는 사실에 경악한다. 이신적(안석환)은 모든 이가 읽고 써서 마침내 권력을 분점하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기에, 문자 반포 저지에 매달리는 정기준(윤제문)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정기준은 한글의 힘을 보았고, 이신적은 그러지 못 했기에 둘의 반응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신적이 한글을 봤다 한들 달라졌을까. 정기준보다 먼저 한글을 깨우친 채윤도, 문자가 정말 세상을 그렇게 바꿀 수 있는지는 생각하지 못 했다. 정기준이 과장에 노비를 잠입시켜 장원급제를 시키는 역공을 꾸밀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한글이 불러 올 세상의 극단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뿌리깊은 나무> 17회는 인물들의 상상력과 그 한계를 살핀다. 현실을 넘는 과감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수를 놓을 수 있다. 그래서 세종과 정기준은 적이지만 서로의 수를 이해하고 상상함으로써 전진한다. 하지만 정기준은 백성이 권력을 잡고 그것이 실제로 책임정치의 형태로 작동하는 민주주의까지는 상상하지 못 한다. 세종도 노비가 장원급제를 하는 세상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 했기에 정기준에게 역공을 당한다. 자기 상상력의 틀을 깨부술 때만, 비로소 상대의 수에 응수할 수 있다. <추노>의 천성일 작가는 “사극은 어떤 시대를 쓰는지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상상할 수 있는 자만이 내일을 기획할 수 있다’ 말하는 드라마가 이 시점에 도착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세종의 ‘모두가 읽고 쓰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당시로선 얼마나 혁명적인 상상이었는지 살피는 일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상상력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하는 일과 멀지 않을 것이다. 세종은 끝내 <훈민정음>을 반포해 새 세상을 열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새 세상을 열 수 있을까. 어제를 빌어 오늘을 말하는 이 흥미로운 텍스트에서 눈을 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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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이승한(자유기고가) 외부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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