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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리더십]컨테이너 사업 뚝심 개척···현대 첫 세계 1위 승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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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6 뉴프런티어 정신 <상>
현대 최초 글로벌 기업 현대정공


1976년 신사업으로 컨테이너 낙점
양산화·자동화·분업화 등 원칙 마련
공장 工事 '110일 작전' 유명한 일화
7년만에 글로벌 톱으로 급성장
故정주영 명예회장도 극찬한 성공
현장·품질·신용, 경영철학 터득

[MK리더십]컨테이너 사업 뚝심 개척···현대 첫 세계 1위 승전보 1991년 4월 현대정공 울산 공장을 방문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오른쪽)이 아들 정몽구 사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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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2000년 8월 30일. 울산시 매암동 현대정공 공장에서는 의미 있는 기념식이 열렸다.

이 날은 현대정공이 컨테이너 박스 국내 생산의 막을 내린 날이었다. 참석한 100여명의 임직원들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고, 서로를 격려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23년간의 쉼 없는 뜀박질 동안 현대정공은 총 266만TEU(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로, 전 세계 컨테이너 공급량의 30%에 달했다. 이를 위로 쌓아올리면 에베레스트산 높이(8848m)의 600배, 한 줄로 이으면 지구의 반 바퀴에 달했다.


컨테이너 사업은 바로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맨바닥에서 시작해 세계 1위의 자리까지 올려놓은 첫 작품이다. 또한 컨테이너는 현대그룹을 통틀어 최초의 세계시장 1위 상품이기도 했다. 자식에 대한 평가에 인색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컨테이너의 성공은 사장(정몽구)의 능력이 우수하기 때문"이라고 치켜세웠을 정도였다.


컨테이너 사업의 시작과 마침의 과정을 살펴보면 CEO 정 회장의 일생의 축소판과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즉, 정 회장은 컨테이너를 통해 '사업의 성공 방정식'을 터득했던 것이다.


현대정공 초창기 정 회장과 함께했고 기아자동차 부회장을 역임했던 유기철 케이디엠 회장은 "컨테이너 사업에서는 많은 기업이 흥망성쇠를 겪었지만 현대정공은 이 사업을 통해 세계 1위 기업으로 성장했는데, 이는 정 회장의 탁월한 경영자질과 수완 덕분이었다"며 "당시 정 회장은 양산화ㆍ자동화ㆍ외주화ㆍ모듈화ㆍ분업화 등 5대 관리원칙을 적용하는 한편, 다른 기업들이 폐업을 할 때 오히려 현대정공은 사업을 확장하는 투자를 진행했다. 이 모든 것들이 정 회장의 결단이었고, 덕분에 회사는 막강한 경쟁력을 지닐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박스'와의 만남= 정 회장의 눈에 컨테이너가 들어온 것은 자동차부품 생산 및 애프터서비스를 담당하는 현대자동차써비스를 설립해 대표이사 사장으로 부임한 지 채 1년도 안된 1976년 5월이었다. 신사업 추진을 고민하던 그는 화물을 실어 나르는 상자형 용기인 '컨테이너'에 주목한다.


직사각형 외형에 내부 공간 크기가 약 34㎥(FEU 기준)인 컨테이너는 1957년 미국 시랜드가 휴스톤과 뉴욕 사이의 연안 항로에 처음 투입한 뒤 신속성ㆍ편의성ㆍ안전성ㆍ저비용 등의 이점이 부각되면서 10년여 만에 세계 교역의 필수 수단으로 성장했다. 더군다나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수출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각오로 수출에 역점을 뒀을 때였기 때문에 바다를 오가는 컨테이너 수요는 엄청났다.


현대그룹 자체 수출물량도 많았을 뿐 아니라 울산시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를 짓고 있었다. 정 회장은 계열사가 만든 상품을 현대정공이 만든 컨테이너에 싣고, 이 컨테이너를 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건조한 현대상선 소속 화물선에 실어 전 세계를 누빈다면 이만한 시너지는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110일 작전'의 기적= 진출을 결정한 뒤 전문 인력 확보ㆍ사업계획 수립ㆍ생산공장 건설ㆍ국내외 영업활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신사업을 하루 빨리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는 정 회장의 의지 때문이었다.


특히 공장 건설은 기적이라고 할 만큼 빠르게 이뤄졌다. 1976년 11월 10일, 잡초만 무성한 황무지 벌판이었던 울산시 매암동 공장터에서 열린 착공식에서 정 회장은 이날 날짜를 딴 '110일 작전'이라 명하고 3개월 안에 생산체제를 갖출 것이라고 선언했다.


공사는 현대그룹 특유의 '돌관(突寬)'작업 방식으로 추진됐다. 돌관작업은 공기단축을 위해 주야간 가릴 것 없이 24시간 공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정 회장 스스로 현장을 직접 지휘하며 뼈대가 올라가고 있는 공장 한 켠에 드럼통을 놓고 현장 직원들과 삼겹살을 구워먹고, 숙소인 천막에서 직원들과 섞여 잠을 청했다. 예상대로 3개월 만인 1977년 2월 10일 5425m²(1641평) 규모의 1개 생산라인을 갖춘 1공장 A동이 완공돼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A동 완공후 6개월도 안 돼 생산이 수요를 따르지 못할 정도가 되자 생산라인 증설이 시급했다. 바로 옆 B동 공장도 돌관작업으로 진행했지만 가동은 1년 후에야 가능했다.


이 때 정 회장은 황당한 결정을 내렸다. "제조공정 흐름을 보다 빨리하기 위해 별도 작업장에서 (컨테이너의) 각 부분을 생산하고 정규 생산라인에서 조립한다"는 것이다. 즉, A동 건물과 주조공장 건물 사이에 있던 길을 막아 지붕을 얹어 임시로 별도 공장을 건설한다는 것인데,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였다. 일부에서 볼멘소리를 냈지만 정 회장이 앞에 나서 함께 자재를 운반하며 전 직원들을 독려했고, 다음날 이를 해냈다.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큰 충격이 된 이 하룻밤 사이의 돌관작업. 이후 모든 작업은 이러한 정신으로 이뤄졌다"는 한 직원의 말은 지금도 회사에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1978년 10월에는 매암동 1공장 B동과 염포동 부지에서 공사를 단행한 컨테이너 2공장이 완공됐다. 이로써 현대정공의 컨테이너 생산량은 2년도 채 안돼 월 600대에서 6300대로 급증했다. 이는 국내 총 생산량의 58%, 세계 생산량의 11.4%로 국내 컨테이너 제조업계 선두주자에 오른 것은 물론 당시 세계 1위였던 일본 도큐카에 견줄만한 규모를 이뤄냈다.


◆'500원 지폐'만 있었어도= 영업활동은 공장 건설에 앞서 개시됐다. 정 회장이 직접 일본을 비롯한 각국으로 직접 해외출장을 다니며 바이어들을 만났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컨테이너 영업 담당 직원들은 너무나도 힘들었던지 명예회장은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로 첫 선박을 수주했던 사례를 떠 올리며 "조상님이 진작 컨테이너를 발명했으면 지폐에도 그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까지 들었다"고 푸념했을 정도다.


현대정공에서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바이어들이 직접 찾아와 공장을 보여 달라고 할 때가 가장 곤혹스러웠다. 공장을 안 보여주면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막무가내로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며 "흥분한 바이어를 진정시키는 일은 고스란히 정 회장에게 넘어갔는데, 정 회장은 세계가 현대의 신용과 품질을 인정하고 있으니, 최고 품질의 컨테이너를 만들어 주겠다며 설득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결국 정 회장은 1977년 3월 일본 종합무역상사인 가네마쓰 고쇼(현 가네마쓰 상사)의 중계로 미국 컨테이너 리스업체인 유니플렉스로부터 첫 수주를 따냈다. 덕분에 이달 17일 울산 공장은 40피트 길이 컨테이너(FEU) 50대를 첫 생산해 납품했다.


◆"세계표준을 잡다"= 바이어가 원하는 사양대로 생산하던 현대정공은 기술개발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정 회장은 "컨테이너도 단순 철재 조립품에서 오픈탑(Open Top), 플랫백(Flat Back), 벌크(Bulk) 등 특수제품으로 세분화되는 추세로 가고 있다"며 "이러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설계 및 생산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물이 1979년 12월에 공표된 '현대 컨테이너 표준(Hyundai Conrainer Standard)'이었다. 이를 통해 현대정공은 바이어가 주문하는 현재 어떠한 사양에도 대응할 수 있는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이후 전 세계 컨테이너 사양 가운데 90% 이상이 현대 표준형 컨테이너 방식으로 전환될 정도로 현대정공의 컨테이너는 말 그대로 '세계 표준'이 됐다.


◆생산 7년 만에 세계 1위= 기반을 잡은 사업은 승승장구 그 자체였다. 1980년 11월 누적 컨테이너 생산 10만대를 돌파해 단일회사 기준 최단 시기 최다 생산 기록을 달성한 현대정공은 1981년 무역의 날에는 컨테이너 단일 품목 1억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이어 1983년에는 생산실적 기준 5만5000대로 세계시장 점유율 35%를 차지해 5만대 머무른 도큐카를 누르고 세계 최대 컨테이너 생산업체로 등극했다. 일본 해운 전문지 다이아몬드는 현대중공업이 1983년 건조량 기준으로 조선업계 세계 1위에 올라섰다고 보도했는데, 현대정공의 컨테이너가 간발의 차로 그룹 최초 세계 1위 상품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또한 현대정공은 이해 우리나라 컨테이너 수출의 60% 이상을 달성하며 일본을 제치고 한국이 세계 1위 컨테이너 수출국이 되는데 기여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세계 컨테이너 업계의 설비과잉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산능력ㆍ품질ㆍ제품 다양화ㆍ획기적인 영업방식을 적극 도입한 정 회장의 경영수완이 거둔 의미있는 성과였다.


시장 주도권을 획득한 현대정공은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을 지속하는 한편 1990년대부터 생산거점의 글로벌화를 추진해 첫 해외법인 멕시코 HYMEX를 설립한 데 이어 인도네시아, 태국, 중국, 인도, 이란 등으로 세를 확장했다.


◆"여기까지가 끝"= 숱한 위기를 이겨내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컨테이너 사업도 마지막이 보였다. 외환위기 사태 후 그룹 현대그룹 사업 구조개편 작업 과정에서 컨테이너 사업의 미래는 밝지 못하다는 분석이 나온 것이다.


1999년 현대차 소그룹 계열 분리를 눈 앞에 두고 있던 정 회장은 컨테이너 사업 중단을 결정했다. 잠시라도 좋은 모습이었을 때 손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2000년 8월 30일 컨테이너 사업 종료식에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대신 정 회장은 현대정공의 후신인 현대모비스 30년사에 컨테이너 사업을 통해 "현장경영과 품질경영의 중요성을 체험하고 지속할 수 있었고, 이는 저의 경영철학의 근간으로 자리잡았다"며 아쉬움을 남겼다.




MK리더십 특별 취재팀(이정일·채명석·최일권·김혜원·조슬기나 기자)
MKle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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